□ 충무공 이순신의 백의종군로 (임실)
○ 난중일기 (전주 ⇨ 임실 ⇨ 남원구간)
『4. 22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남문 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이 보러왔다. 전주부윤도 대접했다, 기름먹인 두꺼운 종이와 생강을 보내왔다.』
『4. 23 (계미 23일째 맑음) 새벽녘에 일찍 출발하여 오원역(烏原驛)에 이르러 역관에게 말을 쉬게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얼마후 도사(都事)가 왔다. 날이 저물녘에 임실현(任實縣)으로 가니 현감이 예를 갖추고 대접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
『4. 24 임실현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저녘에 남원 십리 밖의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 난중일기 (전주 ⇨ 임실 ⇨ 남원 구간)
4월 22일 [양력 6월 6일]<임오> 맑다.
오전에 삼례역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 부윤(府尹)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 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생강 등을 보내왔다.
4월 23일 [양력 6월 7일]<계미> 맑다.
일찍 떠나 오원역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 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
4월 24일 [양력 6월 8일]<갑신> 맑다.
일찍 떠나 남원 시오리 쯤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나서 남원부 오리 안까지 이르러 우리 일행과는 헤어지고 곧바로 십리 바깥 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희경(李喜慶)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슬픈 회포를 어찌하랴! 어찌하랴!
4월 25일 [양력 6월 9일]<을유> 비가 많이 올 모양이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의 박롱(朴 ) 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 출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한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한)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판관(부시장), 부윤(시장), 도사(부지사)
○임실군 지역 이동경로(통영별로)
전주→이의신의 집→남천교→반석역→좁은목→상관→남관진→만마관→슬치재→ 노구암→두지산→오원역→오원천→시기마을→책평뜰→도마교→용은치→두실→ 두실재→임실향교→임실현청→읍전교,두만천(임실천)→열무재→평교→대곡→말치재→대판리→만세원(봉산마을)→둔남천(평당원천)→종동마을→아쟁이뜰→국평마을→높은안절→상신마을(鶉隅)→멧골→오수역→원동산→금암리→용정리→대정리(대말방죽)→율천→사매면→오리정→밤재→남원향교→ 이희경의 종의 집 → 응령역→ 운봉현
○ 전주 ⇨ 임실34.2km ⇨ 남원35.0km ⇨ 운봉17.84km 백의종군로 걷기
4월 22일 여산을 출발하여 전주 남문밖 “이의신의 집”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은 하룻밤을 머물다 4월 23일 새벽녘 일찍 행장을 꾸려 전주천 남천교(싸전다리)를 건너서 지금의 전주교육대학교 부근 반석역(半石驛)을 거쳐 임실현으로 출발 했으리라, 이의신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이름이 신(臣)자 항렬 인점으로 보아 이순신과는 동항렬 같은 집안 사람일 것이다.
남문은 지금의 풍남문으로 문밖 이의신의 집이 어느 곳일지 사뭇 궁금하다. 이순신이 유숙한 집을 찾고 고증하여 전주 한옥마을 명소와 연계한다면 좋을성 싶다. 싸전다리는 지금의 남천교로 불리우는데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전국의 쌀 시세를 좌지우지 하던 곳으로 전주 남부시장 미곡상의 전신이기도 하다. 싸전다리 건너 반석역은 삼례도찰방 관할 소속역으로 전주부성을 들고 나는 관리들의 역마를 제공하며 공문서를 전달 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한다.
전주천을 건넌 이순신은 반석역과 남고산성 아래 좁은목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 했을 것이다.
좁은목은 남고산성 장대가 지키는 남고진의 목으로 전라좌도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전주성을 들고나는 검문소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전주성의 최후 보루인 방어진지였다 한다.
풍남문 | 남천교(싸전다리) |
전주교대(반석역터) | 좁은목(남고진 목 ) |
좁은목을 지나 고덕산 자락 아래 지금은 완주군 였다가 전주시 덕산, 부남으로 지명이 바뀐 상죽음마을과 하죽음마을이 있고 마을앞 건너편 전주천변 전라선 구철길옆 파쏘는 정여립 생가터(완주군 상관면 신리 월암마을)이기도하다.
정여립 그가 모반사건에 연루된 기축옥사는 임진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에 사건이 터지고 진안 천반산 죽도에서 생을 마감한 후 전라인들이 반역의 낙인이 찍힌 가슴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정여립쉼터 | 월암마을 |
파쏘를 건너서 상관, 남관진을 지나 만마도관 협곡을 거쳐 노구암에 올라 슬치 넘어 동트는 오원역에서 이른 아침을 먹으며 많은 소회를 했을 것 같다.
남관진은 전주성을 지키는 최전방 진지로 군사적 요충지이다. 남고산성 소속의 장대가 파견되어 지키는 곳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주된 목적과 통영별로에 설치된 문루였다.
이곳 남관진은 1873년(고종10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남고진에서 10여리 떨어진 남관에 진을 설치했고, 진에서 5리 떨어진 남쪽 협곡 만마관(萬馬關)과 함께 전주성과 호남평야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지이다.
남관진은 현 남관초등학교 부근 100여칸에 달하는 아사와 산성이 갖추어져 있었다 하며 지금도 도로변에 “남관진 창건비”가 세워져있다. 이 비문은 전주~남원간 도로공사시 발견되어 현 위치에 이설했으며, 남관에 진을 세운 이유는 만마도관이 훼손되고 산성이 헐어져서이다.
만마도관(萬馬道關)은 전주부성인 남고산성의 속성으로 지금의 상관면 용암리 국도 13호선과 전주천 상류를 가로지르는 천연요새였으며 마을아래 도로변 산 비탈면에 성곽의 흔적이 뚜렸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 산성은 섬진강을 타고 올라오는 왜적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세운 군영으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쪽 산 등성이에 이중으로 석성을 쌓아 협곡에 도관의 문루를 짓고 문을 달아 출입을 통제하는 군영으로 만마관은 구례 섬진강변 석주관(石柱關)과 더불어 호남의 관문으로 수문장 역할을 다했던 곳이다.
이 협곡은 전주에서 전라좌도 남원땅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곳으로 국도17호선과 1931년 개통된 전라선 철로가 계곡을 따라 슬치재(瑟峙)라 불리우는 소치(掃峙)를 넘어 임실 관촌역으로 접어들었던 곳이다.
※ 석주관 칠의사묘: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소재, 대한민국의 사적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정유재란 때 전라도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다
이순신은 만마관 협곡을 지나며 지난 세월과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의기를 다졌을지도 모른다.
노구암(爐口岩)은 지금의 슬치고개 산정마을을 가르키며 오고가는 길손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호남정맥 박이뫼산(316m)과 실티재를 사이에 두고 물길이 남으로는 오원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북으로는 만경강으로 흘러드는 전주천의 발원지가 된다. 즉 물길을 가르는 수분령 고개이다.
※노구암(爐口岩):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산정마을 (향로 주둥이 바위), 전주남원간도로 개설로 없어짐
상관면 전경 | 남관초등학교(남관진 터) |
남관진비 | 만마도관(1905.1907) |
만마관 석성터 | 만마관 협곡 |
산정마을(노구암,노암) | 슬치재(소치) |
험한 협곡으로 이루어진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올라 슬치재에서 한숨을 돌린후 오원역이 내려다보이는 두지산(두지뫼)을 지나 오원역(烏原驛)에 당도하여 역에서 말을 쉬게하고 조반을 먹었다고 한다.
오원역은 삼례도찰방 관할 속역으로 지금의 관촌면 소재지 오원천변에 설치된 마방역이다. 역의 아사는 관촌리 옛 선천마을 관촌초·중학교 부근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과 원을 중심으로 역관들과 역리들이 거주하는 역촌으로 교통과 상업이 발달하여 장터가 있던 곳이다. 현재 장터를 뜻하는 시기(市基)마을이 관촌역 앞 오원천변에 현존하고 있다.
구한말 역원이 철폐되고 상하북면을 합쳐 오원면으로 불리우다 1935년에 오천면으로 고치고 그후 관촌면으로 개칭하였다.
오원천엔 오원교와 마항교 두개의 다리가 있었음이 고지도를 통해 알수 있으며, 오원천을 건너면 시기마을에 당도하는데 이곳이 지금의 전라선 관촌역 앞 마을이다.
오원천은 섬진강의 본류로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천상데미와 마이산에서 발원한 물이 서남으로 흘러 섬진강을 만들며 서출 동류하여 남해안 광양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순신 장군은 조반을 먹고 얼마후 지금의 부지사격인 전라도사와 접견을 하면서 오원 다리넘어 산개나리가 노랗게 핀 사선대에서 종군길 긴 여정에 쌓인 피로와 시름을 달래며 시간을 보내다 임실현으로 바쁜길을 재촉하며 내달렸을 것이다.
관촌면 입구 | 관촌초등학교(오원역참터) |
오원천과 사선대 | 관촌역(전라선) |
시기마을 장터를 지나 창인평(책평들) 너른들판에 불어오는 쌀쌀한 강바람을 뒤로하며 임실천(두만천)에 다다라 말에서 내려 도마교를 건너 천변 양지쪽 정자에서 잠시 한숨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창인마을에 들러 타고온 말의 목을 축인 다음 용은치 고개를 넘고 외두실앞 임실천을 따라 오르다 내두실에서 두실재를 넘어 향교를 지나 봉황산 아래 앞골 임실현에 다다라 당시 현감 홍순각의 마중을 받았으리라.
4월 23일 저녁 무렵 임실현 도착하여 현감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하룻밤 유숙을 한다음 이튿날 일찍 남원땅을 향해 출발을 한다.
창인들(책평뜰) | 용은치 고개 (용은치마을) |
두곡리(내두실) | 두실재,향교재(앞골) |
4월 24일 임실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현내면 장터를 지나면 읍내를 가로 지르는 임실천(두만천)이 흐르고 읍전교를 건너 열무재 오르막길을 가파르게 올랐을 것이다.
읍전교는 지금 봉황교라 불리우고 있고 향교쪽 이도리와 임실우체국 부근 임실재래시장을 연결해 주는 다리이다. 열무재는 연무재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임실터미널에서 임실의료원 사거리를 지나 현 감성리 쪽 35사단으로 가는 옛17번 국도 고갯길이다.
고단한 종군길에 열무재를 넘어 평교점 주막에 들러 목을 추기고 재를 넘어 남원땅으로 들어갈 채비를 다시 갗추었을 것이다. 대곡리 산길을 지나 말치재 팽나무 바위 그늘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산 아래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종군길에 처한 장군은 하늘에 억울함을 하소연 했을 법하다.
말치재 계곡길을 내려가 만세원에 들러 전란의 여러 소문과 정보를 탐지하고 봉산마을을 거쳐 둔남천(평당원천)을 건너 오수역으로 발길을 재촉했을 터이다. 평다리라 불리는 평교마을은 마을앞 냇가에 다리가 있어 평다리라 불리우게 되었으며 남원쪽에서 말치재를 넘어 들어오는 길손과 임실현에서 남원땅으로 넘어가는 길손들이 유숙하는 이름하여 평교점막이라 부르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대곡리는 임실현내 대곡면이 있던 땅으로 지금은 상리 하리 2개 마을 전체가 군부대 부지에 편입되어 오랜 세월동안 갈등과 질곡의 시간이 흐른 뒤에 35향토사단이 들어 선 곳이기도 하다.
말치재는 두치재라 불리우기도 하고 재 옆 산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산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시대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말치재 꼭대기 밭 가운데에 둥글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일명 팽나무바위라 불리우며 바위 면에 임실현감 등 선정비가 암각되어 있다.
임실원불교(임실현 터) | 임실동중학교 강당(객사터) |
임실향교 | 의료원사거리(열무재,연무재) |
평교(평다리, 평교점막 터) | 말치재(팽나무바위) ,선정비군 |
말치재 전경 | 말치재 옛길 계곡 |
재를 넘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구불구불 내려오면 성수면 오류리 대판마을 숲이 자리하고 있고 일자로 곧게 난 2차선도로와 마주하게 된다.
이는 전라선 구 철길이 도로로 변한 모습이다. 또한 새로난 전라선 철길이 터널을 뚫고 나오며 들판 위 공중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봉산마을 인근 부근에 만세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지 알수가 없다. 도로로 변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수면 봉천리에 당도하며 봉산마을과 냉천마을이 서로 이웃하며 살아가고 있다.
봉산마을은 청주한씨 집성촌으로 오래된 노거수가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고 봉천리 앞 뜰은 임실군내에서 70년대 새마을 사업과 함께 최초로 경지정리사업을 시행한 곳이기도 하다.
오류리 대판마을 숲 | 봉산마을(만세원 부근) |
봉천들(임실군 최초경지정리지구) | 봉천사거리(17번국도) |
봉산마을 앞 들판을 가로질러 전주 남원간을 오고가는 17번 국도와 평당원천이라 불리웠던 둔남천을 건너 종동마을로 들어선다.
북새터라 불리웠던 종동마을은 남평문씨 집성촌이다. 마을 어귀 청룡산 날 끝에 커다란 선돌을 서있는데 그 크기와 생김새는 장군의 위용을 닮았다.
둔남천(펑당원천) | 종동마을 선돌(청룡모틍이) |
아쟁이뜰 농로를 따라 가다 구 한말 없어진 아잔마을터를 지나면 국평마을 하천 농로변 전진바위에 파여진 한뼘바위 홈은 옛 통영별로 과거 길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다.(과거길 선비들이 이곳 전진바위를 지나기 전에 미리 나뭇가지를 꺽어 들고 한뼘바위 홈에 나뭇가지를 대보아 딱 맞으면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맞지 않으면 낙방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국평마을은 국화뜰 즉 춘향전에서 과거급제하여 남원 땅으로 내려오는 이도령과 방자가 만났던 곳으로 일명 구홧뜰로 부르는 곳이며 구한말 호남대동의병장 전해산장군의 출생과 성장지이기도 하다.
국평마을에서 높은안절 고개 도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면 메추래기 즉 순우라 불리웠던 대명리 상신촌 마을과 오수면 소재지가 지척에 있다.
높은안절이라 부르는 고갯길은 산아래 하천 절벽에 난 벼룻길였었는데 일제강점기 신작로와 17번국도가 나면서 높이가 낮아지고 길이 넓어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천변에 난 험한 고갯길이라 사고도 많았고 특히 6.25동란때 보도연맹에 연루된 사람들이 학살된 현장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아쟁이뜰(옛 아잔마을 터) | 전진바위(한뼘바위),선정비군 |
국평마을(구홧뜰,국화뜰) | 높은안절(구.17번국도) |
메추레기라 불리웠던 상신촌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대명리에 속하게 된 마을이다.
도로옆 용바위라 불리는 대멩이 바우에서 유래하여 크게 빛이 나는 마을이 되라고 대명리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대멩이 바위면에 대명암(大明嵒)이 암각 되어 있다.
1992년 둔남면을 오수면으로 개칭하였으며 살신구주의 정신이 깃든 의견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실현의 남면과 남원부의 둔덕방 등을 합해 오수역참이 있던 오수리를 소재지로 하여 통합 하였다.
오수는 고려시대부터 역참이 있었고 조선초기 전라도 3대역의 하나인 오수도찰방이 집무하는 수역이 되어 전라좌도 11역을 관할하였다. 오수역참 터엔 500년이 넘는 큰 은행나무가 고을의 오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고을의 중심지 였던 원동산 부근은 5일장 시장이 형성되어 오다 근대에 들어 폐쇄되어 역사의 뒤 안길로 숨어 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종군길 당시 오수도 찰방은 권수기(1595~1598)이다.
분명 이른 아침에 임실현을 출발한 장군 일행은 오수역에 들러 찰방의 영송과 지대를 받았을 터인데 난중일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오수(獒樹)는 큰개나무라는 뜻이며 역이 있어 물산이 풍족하고 교통이 발달하여 주변 4개 시·군 8개면의 중심지로 또한 호남과 영남의 통영별로 길목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로였다.
1931년에 개통한 전라선 오수구역사, 6.25동란시 향토수호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공적을 새긴 향토수호공적비, 고려시대 해경,월산대사가 창건한 해월암, 창암 이삼만선생의 숨결이 남아있는 탁월정이라 불리웠던 신포정, 고려시대 불상인 관월리 석불, 원동산 의견비, 근대유산 문화재로 지정된 오수망루, 3.1만세운동 당시 전국최초 보통학교학생들이 불렀던 3.10만세운동, 구한말 여류명창 이화중선 생가터, 31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오수양로청, 조선조 성종 2년(1471)에 찰방 옥순이 세운 득가정 등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을이 아닐 수 없다.
상신마을(순우,메추레기) | 오수 입구 |
구.오수역사(전라선) | 오수역참터(오수도 찰방 관아터) |
오수 망루 | 원동산(의견비각) |
장수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 상류 지류인 오수천을 건너 금암리를 지나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하면 대정저수지라 불리는 저수지를 만난다.
조선 후기 남원 용성지 제언조에 대야지방축으로 소개된 방죽이다. 주변 소나무와 왕버드나무 군락지로 2011년 전국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 보존되는 곳으로 2005년 가시연꽃 군락지로 보호 받고 있기도 하다.
대정저수지 | 관란정 |
방죽가에서 잠시 피곤한 여정을 달래며 갈증을 달래었을 것 같다. 발길을 돌려 들판을 가로 지르면 남원시 덕과면 월평리를 나오는데 여기는 덕과면의 소재지 마을이기도 하다.
원래 덕과면은 남원부 덕고방과 적과면을 합한 고을이다. 당초 고을의 중심지는 사곡마을 이라한다. 일제강점투쟁기때 전주남원간 신작로가 생기면서 도로가인 월평리에 면 소재지를 옮겼다고 하며 전주 남원간 4차선 국도가 우회하면서 면소재지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시골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덕과면에서 사매면으로 가려면 오수천 지류인 율천을 건너야 한다.
율천 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매면이다. 사매면은 매안방과 사동방을 합해 만든 면이며 소재지는 오신리이고 이곳 역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면소재지가 되었다고 한다. 서쪽 4km 지점 노봉 아래에 최명희가 쓴 소설 혼불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관이 있다.
남원땅에 연접한 지척인 곳으로 오리정이 있는 고을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말을 이끌며 모래밭 시냇가를 건너 춘향이 고개 버선밭과 박석고개 오리정, 이도령고개 등을 지나 뒷 밤재를 넘어 남원부 성내에 들어 서야 하는데 남원 시오리 쯤에서 정철과 만나 오리쯤에서 일행과 서로 헤어져 저녘에 남원 십리 밖의 이희경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고 난중일기에 소회를 기록했으니, 오리정에서 정철과 헤어진 다음 하룻밤을 유숙한 이희경의 종의집은 도대체 어느곳인가? 백의종군길에 오른 대역죄인은 부성에 들어 갈수 없었다고 하니 남원성밖 십리 지점은 동도역 부근이나 운봉현과 가까운 백암방 또는 백파방내 또는 응령역 부근으로 추정을 해본다. 동도역은 지금의 도통동, 응령역은 여원재 아래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에 있었던 오수도 찰방 관할 11역 중 한 곳 이다.
덕과면 | 율천교 |
사매면 | 춘향이 버선밭 |
버선밭 | 춘향이고개(박석고개) |
오리정 | 율치(뒷 밤재) |
충렬사(정유재란 8충신) | 남원향교(진강루) |
남원시가지 (남원로터리) | 남원문화원(남원부 관아터) |
4월25일 조반 후에 운봉 박산취(朴山就)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퍼부어 나설수가 없었다. 여기서 들으니 원수 권율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 한다. 곧 사람을 금오랑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 남간은 병으로 나오지 아니했다.
※금오랑: 의금부 도사를 지칭하는 말, 종군 수행 의금부 도사 이사빈(李士贇)
이후 이순신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되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선조31년 11월 19일(1598년 12월 16일)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적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이로써 선조25년 4월 14일(1592년)에 부산진에서 발발한 7년의 전쟁이 종식 되었다(글쓴이 흘러가는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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