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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육 최양선생 돈적소(晩六 崔瀁先生 遯蹟所)

흘러 가는 2019. 8. 12. 21:24

[晩六 崔瀁先生 遯蹟所]만육 최양선생 돈적소


0 탐방지: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고중대, 둥지리골) 돈적소

0 탐방일: 2019.8.12.월,14:00 흐리고 비 

0 돈적소는 팔공산(八公山1151m,중대산中臺山)아래 해발 850m 북사면 암릉 석벽 아래에 뚫린 2층 수직 자연암굴이다. 암굴 입구는 2.5m정도이고 석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차 좁아지며  깊이는 10여m, 2층 구조로 된 수직 굴 형태로 서로 이어져 있다. 2층 석굴은 잔돌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지냈던 흔적이 역력하다. 

- 찾아가는 길은 진안군 백운면에서 장수군 장수읍으로 넘어가는 742번 지방도(백장로)를 타고 가다. 고중대 백운교 교각 아래에 주차를 하고  우측 임도 입구에서 안내 표지판 방향으로  300여 미터 임도를 타고 진행하다가 좌측에 작은 안내 표지판이 나오면 산길로 올라 가야한다.

0 최양선생(1351~1424)은 두문동 고려충신 72현의 한분으로 포은 정몽주선생의 조카이기도 하다. 선생은 전주최씨 만육공파(충익공)중시조로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유허지)를 중심으로 전주와 진안, 임실, 남원 등지에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세거하고 있다, 백운면 반송리에는 그를 기리는 유허비각(전라북도 기념물81호)이 있으며, 임실군 지사면 원산리 덕암서원에 포은 정몽주선생과 함께 만육 최양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임실군 지사면 계산리 산85번지에 만육선생의 손자인 판서공파조 인의헌 최여달(崔汝達)의 묘소가 있다.(흘러가는)


0 만육 최양은 고려 시대 문신으로 태조 이성계와 동문수학한 벗이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우고 실권을 잡은 후 만육에게 조정에 나와서 벼슬하기를 요청하였으나 만육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조정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에 걸쳐 있는 팔공산 ‘돈적소’라는 석굴에서 은둔했다. 이곳은 원래 절터였는데 만육은 이곳의 한 스님이 공급해주는 식량으로 살았다고 한다. ‘돈적소’는 만육이 돼지처럼 살았던 굴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만육이 3년간 돈적소에서 은둔했는데 나라에서는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만육 선생과 돈적소」의 주요 모티프는 ‘만육 최양의 충절’과 ‘은둔과 관련된 지명’이다. 이 전설은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인정하지 않고 고려 신하로서 충절을 지키기 위해 72명의 선비가 두문동에 들어가 평생 은거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설화와 같은 맥락에서 전승된다. 고려 유신들의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인 ‘두문동’은 ‘돈적소’라는 현실의 지명으로 대체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는 ‘돈적소’라는 지명의 유래를 만육 최양의 은둔과 관련지어 밝히는 지명 유래담 성격도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진안문화대전)

 



돈적소 임도 입구

돈적소 안내판

742번 지방도 백장로 아래 백운교 교각 우측으로 진입 임도를 타고간다

임도 차단기를 넘어 직진

임도에서 바라본 백운교

비포장 임도에서 좌측 안내판 쪽 산길로 접어 들어야 한다. 알바주의

돈적소 이정표지 안내판

신암리 임신마을 전경 이골짜기는 30여리가 넘는다.

무덤 뒤로 직진

맷돼지 등 비비는 구충나무

구충 나무를 지나 좌측길로

이곳 안부에서  1시방향으로 직진 능선으로 올라야 한다. 알바 독도주의

노란 페인트칠이 된 참나무를 보고 올라야 된다. 

능선길

오름 급경사 능선길

능선길에서 우측 바위아래 안부길로 오르다보면

돈적소 입구 바위가 나타난다.

아래에서 본 돈적소 암굴

위쪽에서 바라본 암굴 형태

                                                  안 내 문

  이곳은 최양 만육선생이 불사이군이란 충신의 도를 지키기위하여 3년동안 은거했던 동굴이다.

두문동72현중의 한분인 선생은1392년 4월 포은 정몽주 선생이 선죽교에서 장절하자 이곳을 찾았다. 선생의 자는

백함이이요 본관은 전주이며, 시호는 충익이다. 원조 군옥의 7세손으로 1351년(고려 충정왕 3년)에 탄생했다.

선생은 29세에 고려조에서 거듭 세번 대과에 장원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숭록대부, 영좌 두 재상자리에 불렀으나 응하지 않했다. 1400년, 온양에서 태조는 처음 한림

이수지를, 다음에는 예조참의 조영무를, 세번째는 예조판서 김약채를 보내는 편에 이번에도 불응하면 직접 찾아 가겠

다는 친서를 보내 왔다. 선생은 할 수 없어 온양으로 행궁했다. 이때 이태조는 하상 악수 반갑게 맞은 다음, 많은 폐백

과 완산공전 800결(약 8만석거리)을 녹으로 주었으나 선생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좌,우 재상들이 죄를 주어

마땅하다고 태조에게 주청헸으나 태조는 '천자인 광무제도엄광을 친구로 대했는데 제후의 왕인 내가 어찌 충현의 선비

를 해하리오' 하고 무마했다.


  1424년 5월 선생은 74세를 1기로 의롭지 않은 부귀영화는 헌신짝 처럼 버리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초야의

고매한 선비로 생을 마쳤다. (세종 6년) 당시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영을 내려 만육의 후손이 등과하면

기용할 것, 살인자가 있더라도 악형치 말고 군역을 면제하라고 했다. 성복날에는 도승지에게 학문 도덕은 정이천 같고

절의 청직은 엄광과 같다는 치제문을 보냈다.


  태조와 만육선생간에 온양에서의 대담요지를 서술하여 금감록이라 이름하고 이씨가 영원할때까지 잊지않기 위하여

장서각에 비치하고 그 한권을 만육 후손에게 주었다.


  선생의 사우로는 서산서원(전주훼철), 고암서원(공주 훼철), 덕암서원(임실), 영계서원(진안)이 있다.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 선생의 유허비가 서있다. 이 유허비는 1992년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81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어린이회관(덕진공원 내) 향토문화회관에는 선생의 영정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1993.7)

선생의 유택은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대승동에 있으며, 매년 3월 15일에 제향한다.


                                                    1995년 (을해)  5월   일

                                                         - 진안문화원 - 


암굴 내부모습

돈적소(遯蹟所) 암각서

암굴내부 암각서

晩六崔先生 遯蹟所 - 만육최선생 돈적소


암굴 내부에서 바라본 모습

2층 수직굴 내부 모습

2층 수직굴에서 바라본 모습


돈적소 암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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