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도 오수역
오수는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역참(驛站)과 원(院)이 설치된 곳으로 사람과 물산의 교류가 활발하여 인근 7개 지역(장수군 산서, 임실군 지사, 삼계, 순창군 동계, 남원시 덕과, 사매, 보절 등)의 중심지로써 상업과 교통문화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신식 우정제도의 도입과 철도교통의 발달로 역참의 기능이 멈추었고, 1931년 전라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오수역참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있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역주민들이 옛 역참터에 오수역참지(獒樹驛站址) 표지석을 세워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아울러 우리고장의 위상을 드높이고자 아래와 같이 오수역참의 유래와 연혁을 밝힌다.
고려시대 오수역은 남원도(南原道) 창활역(昌活驛) 관할 12역 중 하나였고, 조선시대에는 오수도(獒樹道)의 수역으로 11역을 관할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21년(1439) 오수역승(獒樹驛丞)을 두었다가 세조 3년(1457)에는 정역 찰방(程驛察訪)을 파견하였으며, 세조 8년(1462)에는 병조 소속 외관직인 문관 종6품 찰방을 두었다. 오수역이 관할하는 역에는 남원의 동도ㆍ응령ㆍ창활, 운봉의 인월, 곡성의 지신, 순천의 낙수ㆍ양율, 여수의 덕양, 구례의 잔수, 광양의 익신ㆍ섬거 등 11개 역이다. 오수역은 한양에서 590리, 전라감영에서 90리, 남원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며, 가장 멀리 떨어진 광양의 섬거역까지는 240리이다.
역원은 왕명의 전달,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지대, 관물과 진상 등의 물품 운반, 관원 사행시 숙박 및 마필 공급, 통행인 검문, 죄인 체포압송 등의 역할을 하였으며, 호남읍지 남원부(1872) 오수역조에는 역리(驛吏) 727명, 역노(驛奴) 178명, 역비(驛婢) 42명이었고, 역마(驛馬) 15필, 복호(復戶) 322결, 보인(保人) 322명, 보솔(保率) 161명, 일수(日守) 10명, 인호(人戶)는 360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수역참비건립추진위원회)
0 지난 4월 오수면에서는 뜻있는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오수역참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진영)"를 구성하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10월 1일옛 역참터(오수시장주차장)에 "오수도 오수역참지"비를 건립 완공하였다. 제막식은 다가오는 10월 12일 건립위원회 주관으로 치루어질 계획이다.
0 역참지 비문 제자(題字)는 우리고장 오촌마을 출신으로 오수역장을 역임하신 "중수 박태규선생"께서 하셨다. 선생께서는 오수연서회장을 역임하셨으며, 국전에서 대상(서예)을 받으신바 있으시다. 또한, 파비로 발견 수습되어 보관해오던 "찰방 최주하 선정비"(숙종34년 1708,숙종38년 1712)도 같이 다시 세웠다.
0 이제 일천년 터전위에 반석을 다시 다져 역참비를 세웠으니, 번성했던 역사를 회상하면서 번영의 길로 재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수역참비건립추진위원장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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