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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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여도(남원부,임실현)

흘러 가는 2015. 9. 2. 08:45

광여도

(제작시기: 19세기 전반, 규격: 36.8×28.6cm, 구성: 7책)
19세기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 충청도 도지도인 <湖西圖> (제 2책 첫면)에 魯城이라는 군현명이 보인다. 원래 尼山으로 불렸던 이 군현은 1776년(정조 즉위)에 尼城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00년(순조 즉위)에 노성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명은 광여도편찬 시점의 하한선이 1800년임을 알려 준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전국 군현지도집은 이 지도집을 제외하고도 해동지도 (규장각), 여지도(규장각), 광여도(규장각), 여지편람(일본정가당문고) 등의 이름으로 전한다.
광여도 전체의 구성은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세계지도, 외국지도, 요계관방도, 조선전도 뒤로 각 도별지도 아래 군현지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1-7책에 걸쳐 경기도(1책), 충청도(2책), 전라도(3책), 경상좌도(4책), 경상우도(5책), 평안도(6책), 황해도(6책), 강원도(7책), 함경도(7책) 도지도와 군현지도, 그리고 주요 군사적 요충지의 지도들이 실려 있다.
영조대 중반부터 계속되던 官撰 회화식 전국군현지도집 편찬의 전통은 19세기에 단절되는 것으로 보인다. 기호식 지도집 편찬의 흐름이 영조대 말부터 대세를 형성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합리적인 윤곽을 가진 기호식 지도집을 편찬해 활용하게 되면서 과거의 회화식 관찬 군현지도집은 정책 자료로서의 의미를 더 이상 가지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공적 통치력이 급속히 이완되는 19세기의 정치적 환경과 맞물리면서 회화식 군현지도집이 민간에 유출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광여도는 해동지도와 유사한 18세기 군현지도집이 민간에 유출되면서 만들어진 지도집이다.
상당수의 군현지도들은 지도의 윤곽이 해동지도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18세기 전반기의 사정이 군현지도에 반영되어 있는 것도 해동지도와 유사하다.
해동지도와는 달리 安陰縣이 수록되어 있는 것, 마테오리치의 <산해여지전도> 계열의 지도가 <천하도>>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점 등은 해동지도와는 다른 양상이다.
도로를 표시하고 있지 않으나, 주요 교통로 상의 역원과 고개 등을 표시했다.
특히 함경도 등에서는 고개, 비탈, 덕 등 한글식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식 면에서 보이는 진전된 측면은 지도와 설명문이 분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도면과 별도로 쓰여진 설명문에는 호구, 전결, 부세, 군정 등군현의 사회경제적 사정을 알려주는 항목들이 주로 설명되고 있다. 해동지도 등 다른 군현지도집의 도면 및 설명문과 대조해 가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자료이다. (배우성)

(임실현지도)

 

 

(면명 설명) -다소 견해가 다를 수 있음(김진영)-

-상신덕면: 지금은 대부분 신평면이며 북창 근방의 면이었다.

-하신덕면:            "          신덕면이며  신덕리와 수천리 근방의 면이었다.

-상운면: 지금의 운암면이며 쌍암리(옛 입석리) 근방 면이었다. 지도상 표기가 누락되어있다.

-하운면:          "               운암리(하운암) 근방면이었다.

-신평면: 지금의 신평면이며 원천리 근방의 면이었다.

-현내면: 지금의 임실읍이며 읍내 소재지면이다.

-신안면:          "                  신안리 근방의 면이었다.

-이인면:          "                  이인리 근방의 면이었다.

-대곡면:          "                  대곡리 근방의 면이었다.

-상북면: 지금의 관촌면이며 관촌리 근방의 면이었다. 삼례도 속역인 오원역이 설치된 곳이다. 

-하북면:          "                  방수리 근방의 면이었다. 지도상 표기가 누락되어 있다.

-상동면: 지금의 성수면이며 양지리 근방의 면이었다.

-하동면:          "                  오류리 근방의 면이었다.

-옥전면: 지금의 청웅면이며 옥전리 근방의 면이었다.

-구고면:          "                  구고리 근방의 면이었다.(옛 현)

-강진면: 지금의 강진면이며 갈담리 강진마을 근방의 면이었다. 삼례도 속역인 갈담역이 설치된 곳이다.

-덕치면: 지금의 덕치면이며 회문리 근방의 면이었다.

-남면: 지금의 오수면이며 군평리 근방의 면이었다.

 

(지명 설명)

-소화치: 지금의 신덕면과 완주군 구이면의 경계지점으로 작은불재로도 불리운다. 경각산과 치마산 사이의 재이다.

-중산점치험: 정읍시 산외면 종각산 과 구절재로 넘어가는 험로의 재를 말한다. 계곡이 깊고 길이 험한 고개를 "험애구"라 한다.

-익산: 나래산의 옛 이름이다.

-당치: 운암면 운종리와 운암리 신기마을 사이의 고개이다.

-율치: 강진면 학석리 율치마을에서 하운암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선압사: 백련산 아래에 있던 사찰, 청웅면 두복리 사동마을에 절터가 있고 고려때 창건되어 조선후기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지금은 옛터에 유허비만 남아있다.

-용은치: 임실 두곡리 외두실에서 관촌면 용은치 마을로 넘어가는 옛길이다. 이길을 따라가면 신평면 창인리에 당도한다.

-마항교: 관촌과 신평 대리를 잇는 오원강 다리이다.

-오원교: 관촌 소재지를 잇는 오원강 다리이다.

-사자산: 관촌면 상월리와 완주 상관면 마치리 경계의 산으로 높이는 566m이다.

-신흥사: 사자산 아래 관촌면 상월리 소재의 절로 백제때 창건하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2호이다.

-금당치: 관촌 도봉리와 임실읍 금당마을 사이의 고개로 진안으로 넘어가는 옛길 고개이다.

-백련산: 강진면 백련에 위치하며 봉우리가 하얀 연꽃을 닮았다 하여 백련산으로 불리우며, 일명 영취산이라고도 한다. 높이는 754m이다.

-용요산: 임실읍의 진산이며 산의 형세가 "용의 허리"를 닮았다 한다. 옛 토성터가 남아있다.

-운수산: 운수봉으로 알려져 있으며 읍내의 산으로 "운수정(雲水井)"샘이 있고 죽림암 암자가 있다. 군명 운수의 지명이 이곳 운수정에서 유래 되었다. 

높이는 409m이다.

-고달산: 관촌면 고덕마을과 성수 삼봉리 경계의 산으로 진안 백운면과도 인접해 있다. 여덟봉우리로 8봉이 정상이다. 덕이 높은산이라하여 지금은 고덕산이

라 불리운다. 또한 고대산으로도 불리워 졌었고. 높이는 625m이다. 성수지맥이 맞다아 있다.

-벽운루: 임실읍 중동에 있던 누각의 하나로 지금은 없다. 다만 위치상 임실천변으로 추정한다.

-모치: 毛峙는 지도상 신안면과  구고면 사이의 고개로 표기되어있어 지금의 모래재를 모치로 표기 한것으로 추정한다.

-학정서원: 청웅면 구고리에 1995년에 복원한 서원이다. 선조33년(1600년)창건하여 유지되어 왔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옛터에 군비지원으

로 구고리에 복원하였다.

-서창: 현의 서쪽 창고로 강진면 백련리 신기마을 서창뜸에 있었다 . 각 고을마다 사방에 창고를 설치하여 군휼미와 징세미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했다, 

현의 북창은 신평면 북창마을이고, 동창은 임실현내에 남창은 남면쪽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갈담원: 강진면 갈담리 섬진천변에 설치된 원으로 관아에서 운영하는 숙박과 여객시설이다. 삼례도 소속 갈담역내에 있다.   

-사문산: 四門山은 회문산(回文山)을 오기 한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830m이다.

-갈담교,중진원교: 강진면과 덕치면 사이의 섬진강에 설치된 다리이다. 갈담쪽을 갈담교로, 덕치쪽을 중진원교로 표기하였다.

겨울에는 다리로 통행을 하고 여름에는 배를 이용하여 통행하였다.

-발산: 청웅면 발산마을 뒷산이자. 또한 발산은 남산리 마을의 하나이다. 구고리에서 발산을 거쳐 당시 옥전면 입석, 주치로 넘어간다.

-노치: 임실군 덕치면과 순창군과의 경계 고개이다. 다른지도에는 "노령애구"로 표시 되기도 한다. 

-말치: 末峙로 표기되어있다. 오수면 봉천리에서 임실읍 대곡리로 넘어가는 재이다. 두치(斗峙),마치(馬峙)로 부리우기도 하며. 옛 국도이다.

-굴치: 임실읍 갈마리 해평마을 굴치(두지)뜸에서 성수면 신촌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가지사: 성수산에 있던 절로 지도에 큰사찰로 표기되어있어. 상이암의 본사찰로 여겨진다.

-성수산: 임실군의 진산으로 고려, 조선창건 이야기가 전해오는 상이암과 삼청동 비가 있는 산이다. 높이는 876m이다.

- 현 벽운루 앞에 큰 방죽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향교 넘어 동쪽 하천가에 둥그런 방죽과 같은 형상이 그려져 있는 곳은 아마 방죽이나 갈마리 앞 임실천의 호소인듯 하다. 

 (광여도 임실현 주기)

(임실현 주기)

-민호: 5,334호

-금어상번군 154명: 병농일치 번상군으로 중앙의 5군영(훈련도감,총융청,금위영,수어청,어영청)에 번상하는 임실현의 백성(군졸)의 수를 나타내며,상시적으로 올라가는 징집군의 형태이다. 큰고을은 50~60명, 작은고을은 30~40명을 지원과 징집을 병행하여 뽑아올린다. 군역기간은 1회에 2달 정도라고 군역서 관련 기록에 써있다.

* 조선시대 양반과 양민, 천민을 막라하고 모든백성이 번상에 참여 하였으나 양반들의 참여기피로 후에는 양민과 평민 천민등 힘없는 자들만   준 강제로 군역에 징집된다

일반 백성들은 번상에 나가면 가세가 기울고 군역이 힘들어 이를 면탈하고자 지방의 향리와 군리들에게 일정금액의

뇌물을 바치는 등 그 폐해가 심각하였다, 즉 번상의 명령이 내려오면 탐관오리들은 이기회에 한몫 챙기고자 하였고 백성들은 이를 면탈하고자  안간힘을 다 기울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고을의 지방민들은 그 신분에 따라 군역에 참여해야 했고 민호의 장정들은 모두다 군영에 편성(동원 예비군 형태) 중앙군,지방군에 편성되었다..

-속오군 549명: 조선후기 임지왜란 이후 선조때 16세 이상의 양민이나 공사노비로 조직한 편대이다. 속오군의 편제는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평시에는 농사를 짓는등 생업에 종사하며 일정의 군포를 바치게하고, 훈련할때와 유사시에는 군역에 동원하였다. 지금의 예비군 형태이다.

*속오군 편제는 적국적이고 병자호란후 인조14년(1636년) 86,000명으로 시작 숙종7년(1681년) 20만명에 이르렀다 한다,

 편제수는 1초 단위로 편성(120명 정도, 지금의 중대급)

-별영군 60명: 일종의 지방군으로 현종 12년(1671년)에 설치 되었다가 숙종 8년(1682년)에 금위영 설치와 함께 폐지되었다고 한다

보군의 편대 형태로 지금의 보병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감영아병 271명: 각도에 설치한 감영군으로 전라도 감영에 번상해야하는 군졸수 이다. 마병,표하군,아병 으로 나뉘는데 각 고을에서 상시적으로 번상

해야하는 군졸이다. 임실현은 아병을 모아 번상한 것을 알수 있다.

=납미군질: 12두식

-어영원보 136명: 어영청 군영에 동원되는 군역자의 보인의 역활을 해야하는 백성수

-금위원보 138명:금위영 군영에 동원되는 군역자의 보인의 역활을 해야하는 백성수

(보인保人)

조선시대 평민 남자가 부담하던 국역(國役)의 하나. 조선은 초기부터 양인(良人;평민)을 중심으로 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개병제(皆兵制)를 확립하여 양반계급을 제외한 16~60세의 평민에게 군역을 부과하였다. 이것을 정규 군사로서 활동할 호수(戶首)와 그 경제적 뒷받침을 맡을 봉족으로 구분하며, 현역으로 뽑혀 번상(番上)하는 사람에게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장정을 봉족으로 삼게 하여 집안 일을 돕게 하였다. 1464년(세조 10) 봉족제는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어 봉족을 보인(保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납이필질

-어영자보 101명: 자보는 재물 즉 돈으로 일정금액 세금으로 바치고 군역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어영청 번상군 유지비 세금을 내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별파진 20명,1687년(숙종 13)에 제도화한 군대이다. 이들은 무관잡직으로 편성되었으며, 각 아문에 소속되어 화포(火砲)를 주로 다루었고, 화기장방(火器藏放)과 화약고(火藥庫)의 입직(入直)을 맡았다.

-금위원보 64명

-포보 181명

-경기병 577명

-경보병 381명

-사복자보 37명: 마부로 동원된자의 보인

-금군피직: 1명: 옷만드는 사람

-금보 20명

-병조여정 10명

-병 장인 82명

-용이여정 3명

-내관보 7명: 내시의 보인

-선공감장인 88명,토목(土木)과 영선(營繕)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이조서리 2명

-악공악생보 8명: 악공에 동원된 자의 보인

-의녀보  6명: 의녀 동원자의 보인

-사옹원장인 8명: 궁중의 음식을 맡아보는 관청에 봉사하는 사람, (아침밥을 챙기는 사람 지금의 식당에 종사하는 사람), 도자기 그릇 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신선 21명

-사합 8명

-각 포막군 40명

-화포군 12명

-순영장인 50명

-좌수군 16명

=각항곡물질

-회부합곡 250석 4두 2분

-진색합곡 840석 3두 5분

-상평합곡 1146석 10두 8분

-위봉산성군향미 1084석 4두

-순검진곡 113석

=전 885결 33부 6속

=답 1984결 16부 7속

=성곽 무

=창 2고

=동 진안계, 서 순창계, 남 남원계, 북 전주계

=18면:대곡면,상신덕면,상동면,강진면,하신덕면,하북삼면,신안면,이인면,하동면,상운면,신평면,옥전면,덕치면,남면,구고면,하운면,상북삼면,현내면

= 번상 및 보인에 동원되는 수가 대략 3051명 정도이다. 남자는 거의 군역에 동원되고 필요에 의해 여자들도 군역에 동원된걸 알수 있다.

 

(남원부지도)

 

 

 

광여도 남원부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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