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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역제도 정비

흘러 가는 2015. 9. 4. 11:21

역제도의 정비


조선시대의 교통·우송·숙박을 도왔던 가장 중요한 제도는 역원(驛院)이었다, 역원제도는 이미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처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이를 다시 정리해 전국을 22개 국도 525역으로 연결하고 공문서의 전달, 물품의 운송, 공무로 왕래하는 관리들의 숙박 등에 편의를 제공해 지방관청간 연락이 신속히 이뤄지도록 했다.


조선은 초기에 고려의 역제도를 새 수도인 한양의 경복궁 앞을 기점으로 개편했다. 또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후에 역의 중요성이 커지자 여러 차례 개혁과 역원 보충, 역로 개보수 등을 거쳐 고려의 제도에서 벗어났다.


조선시대의 역을 총괄했던 중앙 최고기관은 병조이고, 그 안에서 우역(郵驛)의 실무를 맡은 부서는 승여사였다. 승여사는 태종 5년인 초기부터 역의 실무를 맡았던 공역서(供驛署)를 폐지하고 대신 설치한 것이다.


지방 각 도의 역은 종 6품인 찰방(察訪) 또는 종 9품인 역승(驛丞)이 파견되어 감독했고, 각 역은 역장과 역리, 역졸 등을 두었다. 역승은 특기를 가진 하급관리 출신이 많았고 찰방과 함께 녹봉이 없는 관리였다.

 

역장은 역리(驛吏) 가운데서 근면하고 신의가 있으며 문장을 해독할 수 있는 자가 임명되었는데, 역리·역졸(驛卒)의 지휘·감독과 역의 관리, 공무를 담당했다.


역은 중앙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국도에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주로 국도변에 있는 각 읍에 설치되었다.


우리가 종종 쓰는 ‘한참’(一站))이라는 말이 바로 30리 거리 또는 30리를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뜻하는 것이다. 옛날 일반 서민들은 장거리 여행을 할 때 꼭 등에다 새 짚신 몇 켤레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을 졌다. 길을 걸어가다가 짚신이 다 닳으면 갈아 신기 위해서였다.

 

부산서 서울까지 천리 길을 걷는데, 빠르면 보름이요 늦으면 근 한 달이 걸렸다. 이 같은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때면 보통 30리마다 한번씩 쉬면서 담배를 피우거나 요기를 하지만 조선 초기 서민들은 역이나 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또 나라가 닦아놓은 역로를 일반백성이 걷는 것은 국법에 위배되는 일이라, 서민들은 터놓은 지름길이나 오솔길을 택해 걷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후 지방행정조직이 확산되면서 간선도로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벽지에도 필요에 따라 역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의 역은 관(館)·참(站)·합배(合排) 등으로 불렸는데, 기능이나 조직은 역과 같지만 다만 지역의 관습에 따라 그렇게 부른 것이다.


각 역에는 역을 운영하기 위한 말과 역전(驛田) 12결, 말의 사육을 위한 마전(馬田)이, 역의 운영비용과 종사하는 군졸들의 월급으로는 공수전(公須田), 장전(長田) 부장전(副長田) 급도전(急走田) 등의 농토가 지급되었다. 역에 지급되는 운영비는 규모의 대·중·소에 따라 달랐다.

 

공수전은 관리들의 접대비용으로 지급하는 토지로, 대로 역에는 20결(結), 중로 역에는 15결(結), 소로 역에는 5결이 지급되었다. 특히 중국 관리들의 내왕이 빈번한 황해도는 25결, 평안도와 함경도의 양 경계 역은 10결을 더 받았다. 녹봉은 역장이 장전 2결, 역리가 부장전 1결 5부, 역졸은 급주전 50부를 받았다.


그러나 16세기로 들어서면서 말을 충당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워진 역리 역졸들이 토호들과 짜고 마전이나 공수전 등을 전매하거나 세도가들이 수탈하기 시작하면서 역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기능이 약화되어 갔다.

역의 의무


역의 의무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중앙과 지방 사이의 공문 전달, 관용품과 세공물의 운송, 관리들의 공무여행을 위한 말의 대여와 숙식 제공, 변경에서 생기는 군사정보 보고, 백성의 동정이나 관리들의 비행 감시 등이었다. 역로의 이용은 공무에 국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공용에 준하는 사용에도 허가하는 일이 있어 고급관리들의 폐단이 생겨났다..


육상교통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 경기도의 중요 도선장인 벽란도(예성강∼개성∼연안), 임진도(임진강∼파주∼장단), 낙하도(임진강∼교하∼개성), 중랑교(중랑천∼청량리), 살곳다리, 제반교에는 도(渡)를 두었다.

 

한양 도성으로 출입하는 한강에는 상류로부터 도미진, 광나루, 광장진, 삼전도, 중량포, 흑석진, 동작진, 노량진, 두모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밤섬)진, 양화진, 사천(모래내)진 등의 진을 설치했다. 역격인 이들 진에는 종9품의 도승(都丞)을 두어 관리했다.

 

그러나 자질이 낮은 역로의 역승과 수로를 관리하는 도승들의 폐단이 심해 중종 30년(1535)에는 역승을 찰방으로 승격하고 도승도 뒤에 별장으로 승격시켜 관리했다

 

 

4. 조선시대의 육상교통 부패와 착취 끊이지 않았던 역제도

 

역은 조선시대 중요한 교통기관의 하나였다. 부족한 역마를 보충하기 위해 쇄마고립제도 등 보완책이 등장했지만 관리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민간이 받는 피해가 커져갔다.

 

한편, 역마를 이용하려면 마패가 있어야 하는데 사용자의 관등품위에 따라 각 역에서 제공하는 말의 수가 달랐다. 수시로 말을 지급하는 규정도 있었으나 이와 관련한 잡음 역시 계속되었다. 이처럼 역제도는 갖은 폐단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쇠퇴하고 말았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로의 너비는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 길 양쪽에 있는 배수구의 너비는 2척이었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로는 17.48m, 중로는 5m, 소로는 3.43m이고, 배수구의 너비는 62cm 정도였다. 이러한 한양 성내의 도로 구조는 그 후에도 큰 변화 없이 계속 뻗어 나갔다.

 

 (아래사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따옴)

(1910년 승용자동차)

(고구려 덕흥리벽화 우교거)

(운송수단 나귀)

(나루-역마관리)

(낙동강 나룻배 도선장)

(양반 관리 외출)

(최초 기차 전망대)

(조선 발참로)

(조선10대로)

(조선시대 거경 일정)

(조선시대 역도 찰방역)

(고려시대 주요역도)

(최초 기차)

(최초 전차)

(협괘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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