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사심 없는 산행!! 지역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김진영

가야산 전경!!

가야산과 해인사/가야산 탐방

남계 이중무 가야록 柟溪 李重茂 伽倻錄

흘러 가는 2024. 10. 3. 15:16

=남계 이중무 1568(선조1)~1629(인조7)= 남계문집 가야록 

 

내가 의춘(宜春) 에 있을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시를 읽었으니, 가야산을 안지는 오래되었다. 근래에 산의 아래에 거처하니 일상생활 중에 서로 접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많아 오히려 한 번도 그 실제 경치를 구경하지 못하였다.

이제 가수(嘉樹)에 사는 직보(直甫) 정건직(鄭謇直), 보이(輔而) 송익(宋翊), 응보(膺甫) 이봉일(李奉一), 낙옹(樂翁) 임진부(林眞怤), 덕휘(德輝) 허돈(許燉), 이경(以敬) 홍탈(洪梲), 강양(江陽)에 사는 덕연(德淵) 정인준(鄭仁濬), 임백(任伯) 권양(權瀁), 백화(伯和) 박인(朴絪), 여첨(汝瞻) 김수남(金秀南)과 더불어 지팡이를 함께 하였다.

이날은 바로 천계(天啓) 을축년(1625년) 9월 12일이다.

청량동(淸凉洞)을 지나 무릉교(武陵橋)에 도달하니, 이곳은 한 점의 더러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 드디어 천천히 가서 홍류동(紅流洞)에 이르렀다. 많은 바위와 깊은 골짜기 사이에서 배회하며 새 짓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에 정신을 쏟다가 마침내 최 고운의 시에 화운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聞說孤雲入此巒(문설고운입차만) 듣자니 고운이 이 산에 들었다던데
自家還在是非間(자가환재시비간) 그는 도리어 시비 사이에 있었구나.
儒仙佛學曾誰辯(유선불학증수변) 유학 선학 불학을 누가 분변하랴
獨有詩名重與山(독유시명중여산) 시명만 홀로 남아 산과 함께 중하여라.

모든 사람들이 또한 연이어 시를 지어 읊었다. 인하여 술을 마셨는데, 그 양의 다소는 각자 맘대로 정하게 하였다.

오후에 시내를 따라 가는데, 돌들은 호랑이가 웅크린 듯 용이 발 갈퀴로 잡아당기는 듯 했고, 나는 듯한 냇물은 마치 눈을 뿜어내는 듯 우레를 치는 듯하였다. 마음과 눈이 모두 장엄해졌다. 산은 고요하고 골짜기는 그윽하여 형체와 정신이 더불어 고요해졌다. 이것이 바로 경치를 말미암아 생기는 현상이며 감촉된 것을 따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목이 울창함과 맑은 샘, 흰 돌의 은은함이 길 옆에 비추는 것이, 달이 구름 가운데에서 때론 들어나고 때론 숨으며 때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는 편이, 전체를 다 드러내어 여운이 없는 것 보다 뛰어난 사실과 비슷하다. 전후의 노니는 자들은 이러한 경지를 깨우쳐 아는가 모르는가. 옛날 사람들은, ‘ 새가 울자 산이 더욱 깊어진다(鳥鳴山更幽)’ 는 구절을 산에 거처하는 사람이 적막한 가운데 참을 깨우친 말이라고 여겼다. 오직 물상 너머에서 마음으로 노니는 자들이 이러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천천히 걸으며 때로 쉬다 보니 이미 십여 리를 가게 되었다. 구광루(九光樓)에 올라 잠깐 쉬면서 삼보(三寶)인 승려를 불러 저녁밥을 마련했다. 저녁을 마친 후 승려가 송엽차(松葉茶)를 내왔는데, 큰 사발 하나를 다 마시자 자못 매운 훈채의 기운을 씻어내는 듯했다. 모든 사람이 탐진당(探眞堂)에서 잤는데, 나와 덕연과 여첨은 따뜻한 곳을 취하여 동판각(東板閣)에서 잤다.

그 다음날 아침에 탐진당에 모였는데 백화가 잔을 돌리고 임백이 시를 짓는 색장(色掌)을 맡고 여첨이 차를 맡는 색장이 되었다. 이어서 산행을 하여 백련암(白蓮菴)에 도달하였다. 보운(普雲)이라는 한 노승이 객손을 보자 너그러이 맞아주었는데, 자못 학문을 알아 더불어 산 속의 고사를 이야기하였다. 그에게서 해인사의 창건한 시말을 상세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 암자에서 유숙하였다.

그 다음날 원당(願堂)에 도달하였는데 모든 승려들이 면벽하고 앉아서 객이 와도 보거나 묻는 일이 없었다. 즉 참선하는 중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또 그 암자에서 유숙하였다.

새벽밥을 먹은 후에 건장한 한 화상으로 하여금 점심 밥 상자를 짊어지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이 날이 15일이다. 봉천대(奉天臺)에 올랐는데, 여기서부터는 산이 더욱 험준하고 길이 더욱 위험하였다. 수풀이 우거져 근근이 기어갔다. 한 곳에 이르자 석굴이 있었는데, 몇 간의 방 크기만 하였다. 돌문을 따라 들어가자 냉기가 뼈에 사무쳤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은 얼음이 언덕처럼 쌓이는 곳입니다. 6월이 되어야 녹기 시작했다가 9월이면 다시 얼음이 생기기 시작하지요.”라고 하였다. 너무 추워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다시 추위에 떨면서 부여잡고 올라가니 한 구멍이 있었다. 곧바로 산허리로 통하는데, 길이가 3, 4십 보, 넓이가 몇 길, 높이가 4, 5척 되었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구부려 나오니 막힘이 없이 하늘이 열리였다. 바로 성주(星州) 땅이다. 기이하구나, 조물주의 베풂이여! 그 가운데 샘물이 있는데, 돌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이 매우 맑고 시원하였다. 드디어 샘가에 빙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이어서 우수봉(牛首峰)을 오르니 형세가 매우 위험하여 다리는 떨리고 발은 주저하였다. 한 걸음 두 걸음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꼭대기에 오르니 바로 가야산의 정상이다. 숨쉬는 기운이 곧바로 상제의 자리와 통하는 듯 마음과 가슴이 확 트여 막힘이 없다. 눈을 돌려 사방을 바라보았다. 산이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와서, 서북쪽은 수백 리 사이에 덕유산(德裕山), 금원산(金猿山)이 가로로 뻗혀 있어 시야를 가로막았다. 동남의 산들은 더불어 논할만한 산이 없다. 화왕산(火旺山), 팔공산(八公山) 같은 여러 산들은 모두 무릎 아래에 있어 눈에 가린 것이 없다.

정상에 두 우물이 있는데 서로 통하여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 비에도 넘치지 않는다. 이끼가 그 바닥에 가득 끼었는데도 맛을 보니 역시 달고 시원하였다. 이름을 ‘우비정(牛鼻井)’이라고 하였다. 이 산의 봉우리의 이름이 ‘우수’이므로 우물 이름을 우비라고 한 것인가. 암벽 사이의 수목은 모두 종기 난 듯 트고 굽어 크기가 몇 자도 되지 않았다. 승려가, ‘이곳의 나무들은 5월이 되어서야 잎이 비로소 갈라졌다가 7월이면 다시 마른다.’고 하였다. 그 나무의 마디 사이를 보면 일 년 자라는 바가 2, 3분(分)도 넘지 못하니 그렇다면 몇 자의 높이는 몇 백 년 자라서 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다. 문득 구름이 산에 가득하더니 중간 아래로 막막하여 땅이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군색하게 걸어 내려갈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지팡이를 잡고 산을 내려왔다. 봉천대에 이르자 풀에 이슬이 달려 있고 산골짜기 물이 불어 있으므로, 그제서야 소나기가 땅에 내렸지만 산 위에는 해가 맑고 밝았음을 알게 되었다. 대개 비는 중간으로부터 내리며, 하늘로부터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절에 도달하니 옷과 신이 다 젖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절의 승려가 저녁밥을 장만하고서 기다린 지가 오래였다. 이 날 밤에 달게 잤으니, 그 행역이 피곤했기 때문이다.

16일에 인하여 절문 밖으로 나갔다. 홍류천(紅流川)의 자연이 좋아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하여 흰 돌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한 잔 마시고 한 번 읊조리다가 석양이 이미 산에 왔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드디어 내려가서 청량암(淸凉庵)에 이르러 잤다. 암자는 매우 쇠락하였는데, 한 노승이 불당을 지키고 있었다. 식량을 조달하는 것도 군색하였다. 인생의 말로에 좋은 곳이 없는 것은 절도 마찬가지인가.

다음 날 드디어 슬프게 서로 이별하였다. 밤에 생각해보니 명산을 한 때에 유람한 것이 문득 꿈속의 절경인양 싶었다. 마침내 그 삼일간의 얻은 것을 기록하여 다른 날 와유(臥遊)의 자료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문장이 졸렬하고 말이 껄끄러워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하지 못하니 탄식할 만하다. 옛날부터 이 산에서 노닌 자들이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으나 오직 어진 사람의 자취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산이 현자에게 후하고 보통 사람에게는 박한 것이 아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전할 만한 실상이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대들은 힘을 쓸진져.

* 의춘(宜春) --의춘은 경상남도 의령의 옛 이름.
* 삼보(三寶) -- 삼보는 불가에서 말하는 세 가지 보물, 즉 부처인 불보(佛寶)와 불경인 법보(法寶)와 승려인 승보(僧寶)를 말함.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록 - 이중무 (문화원형백과 유산기,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가야산 전경(남산제일봉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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