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원치 마애불상]
- 탐방일시: 2017.12.28.목
- 탐방지: 여원치 마애불상(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 (운봉 여원치고개) 고려말 조성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162호
- 마애불상 좌측 떨어져 나간 팔아래로 손발가락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손가락 모양인지 가부좌를 한 발가락 모양인지 잘 살펴보면 입상인지 좌상인지 구별 할수 있을 것 같다. ~~~~~~~?
- 마애불상에 관한 이야기
* 마애불상 옆 비문: 여원치마애불상 조성에 관해서 1901년(고종 38) 운봉현감이었던 박귀진(朴貴鎭)이 불상 옆 비문에 기록해 놓았다. 내용은 조선태조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황산대첩에서 크게 이길 것 이라고 예언한 노파에게 감사의 뜻으로 불상을 만들었고, 지리산 산신 도고(道姑) 할미의 도움으로 황산대첩에서 왜적을 크게 물쳤다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인데, 오늘날에도 이 마애불상을 "여상(女像)"이라고 부른다. 마애불의 앞쪽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있는데, 불상 보호각(원:院)을 만들때 쓰인 기둥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 흩어져 깨진 기와조각들이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말(고려 우왕 6년 1380년) 부산으로 침투한 왜적이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로 올라오자 고려 장수 이성계가 이를 소탕 하기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남원에서 인월로 가던 중 여원치에서 "도고(道姑)"라는 노파가 안개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왜구와 대적하여 승리할 계책을 알려주어 황산대첩에서 소년 왜적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승리하여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즉 이 마애불상은 응령역에서 올라오는 정상부 여원재(연재) 길가의 큰 자연석 면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도고 노파(여인)를 형상화 한 여상을 한 불상이라 전해진다.
*이곳은 예로부터 황산대첩에 얽힌 전설과 함께 여원치의 지명에 대한 유래가 전해 오고 있다. 1380년(고려 우왕 6) 인월에 웅거하고 있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고려 조정에서 파견된 이성계장군이 여원재를 넘고 있었다. 정상에 이르자 안개가 자욱하여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문득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나타나 전투 날짜와 전략을 전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장군은 그 계시에 따라 황산대첩을 이룰수 있었다.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 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수치심에 칼로 왼쪽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원한을 품은 원신이었다 한다. 태조 이성계는 이 백발 노파가 필시 자신의 전승을 위한 산신령이라 여겼다. 그래서 노파를 만났던 여원치 석벽에 여상을 새기고 그 위에 산신각을 지어 보존케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그 후 원(院) 을 설치하여 여원(女院)이라 이름하고 이고개를 여원치라 불렀다.(섬진강과 남원의 누정-남원문화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고려말 남원에서 운봉으로 넘어가는 여원치 고개 주막집 주모의 미색이 뛰어났는데 전장에 나온 왜적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들이(아지발도) 그 미색에 반하여 희롱하며 주모의 젓가슴을 만지자 일개 미천한 아녀자 일지라도 절개가 있는법이라 꾸짖으며 자기 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여 정절을 지키자 왜적들이 놀라 물러 났다하며, 전쟁이 끝난후에 이를 가상히 여긴 백성들이 주막이 있던 고개 바위면을 다듬어 정절을 지킨 표상으로 여인을 닮은 불상을 조성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 도고할미가 이성계장군에게 계책으로 이르기를 전장에 진을 칠때 꼭 고남산에 진을 쳐야되며 섣불리 덤비지 말고 달뜨는 날을 택해 싸우되 행여 싸움에서 왜군에게 밀리더라도 후퇴하지 말고 하루낮을 넘겨 하루밤을 꼬박 버티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수 있다고 알려줬다 한다. 실제로 고려말 황산대첩 싸움에서 고려 이성계 장군은 운봉 서북쪽 고남산에 진을 쳤고 왜적장 아지발도는 인월 남동쪽 하천 건너 금대산에 진을 치며 대적 했는데 왜장 아지발도는 16세 소년으로 용맹하고 무예가 뛰어나며 투구와 철가면을 쓰고 있어 화살로 마추어도 죽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달뜨는 날이 다가오자 이성계는 전열을 가다듬고 싸움을 걸어 하루낮을 싸웠으나 승패가 나질 앉고 전세가 밀리자 고남산으로 후퇴를 하려다 도고할미의 계책을 끝까지 믿고 버티어 내어 황산 피바위에서 적들을 무수히 베고 진격 왜군을 고남산 밑으로 밀어 내었다 한다.
그리고 해가 저물고 달이 뜨자 왜장 아지발도가 흐릿한 달빛 속에서 더욱 기세를 올리며 선봉으로 나와 전진할때 이성계장군이 휘하 장수 이지란에게 내가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맞추어 투구가 벗겨지면 얼굴 빈틈을 맞추라 명하고 활 시위를 당기자 흐릿했던 달이 활시위에 끌려 내려와 주위가 갑자지 밝아짐과 동시 두발의 화살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고 한다. 이성계장군의 화살이 적장의 투구끈을 명중시키자 동시에 날아간 이지란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눈을 맞추었다고 한다. 놀란 왜적들은 황산대첩에서 크게 패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달을 끌어 내린 곳. 즉, 끌인 달월 "인월(引月)'이라 불리우며 남원시 인월면에는 달과 관련된 마을 지명이 많고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시작점 이기도한 구인월(舊引月)마을이 활을 쏜 인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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