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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면의 유래

흘러 가는 2015. 8. 7. 11:00

오수면 마을 유래

□ 오수면(獒樹面)의 유래

연 혁

- 고려시대에 남원부 둔덕(屯德 )방이라 불림

- 조선시대는 둔덕방과 남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음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둔덕방과 남면을 통합하고 여기에 남원군 덕과면의 행정구역이었던 오수리와 대명리 일부를 편입하고 면의 이름을 둔덕방과 남면의 첫 자를 따 서 둔남면(屯南面)이라 불림

- 1992년 8월 10일 오수면(獒樹面)으로 행정구역 명칭변경이 바뀜

명칭유래

- 충심있는 개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으로서 이곳 지명을 따라 개오(獒)자,

나무수(樹)자 오수면(獒樹面)이라 불리우게 되었음.

 

□ 마을 유래

○ 관월(舘月)마을

- 약 600여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서 마을의 위치가 서쪽 산 기슭에 있는 평지로서 달 뜨는 곳보다 지대가 약간 높게 사면을 이루고 있기에 어떤 가정에 서도 달뜨는 것을 볼 수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관월(觀舘)이라고 이름을 지었 다 한다. 이 마을은 주민이 비교적 온순하고 원예 및 답 위주로 생활을 영위하 고 있는 마을이며 지방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된 오수 석불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 시장(市場)마을

- 이 마을은 상가지대로서 오수리의 중심지역으로 마을이름을 시장(市場)이     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부근 4개군 9개면(임실군의 오수, 삼계, 지사, 성수,   남원군의 덕과, 사매, 보절, 장수군의 산서, 순창군의 동계)의 생산품과 일용품 의 거래를 이루고 있는 집산지로서 2백여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5일마다 장이 서 성시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남신(南新)마을

-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국도를 중심으로 남원군 덕과면 금암리(현 오수면 금 암리)와 경계하여 남쪽에 위치한 근래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남신동(南新 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70~80여년전에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일제시대 초에는 하신촌이라고도 하였다 가 20여년전부터 남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각종 성씨가 모여있는 조그마한 소재지 마을이다.

 

○ 후리마을

- 이 마을은 오수리 뒷마을로 불리우던 큰촌이었는데 가구수가 불어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후와 동후마을로 나누어졌으며 후리는 서후와 동후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 동후(東後)마을

- 이 마을은 종전에는 후리와 같은 마을이었으나 가구수가 불어나면서 일제시대에 지사면으로 가는 도로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동후리(東後里)라 이름짓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동쪽에는 오수천이 흐르고 있고 현재는 아파트등이 입주하는등 날로 생활권이 발전되는 부락이기도 하다.

 

○ 서후마을

- 이 마을은 종전에는 후리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가구수가 불어나면서 91년 1월 1일 분리되었고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서후리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이 마을의 서쪽에는 둔남천이 흐르고 있다.

 

○ 상리(上里)마을

- 오수리 7개 부락중 제일 윗마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상리(上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50~60호 되는 마을로서 성촌(成村)된지 오래이며 이웃마을 후리

(後里)와 같이 김해김씨 10여호가 집단을 이루고 있고 타성은 몇 안되는 조그마 한 마을로서 마을 앞에는 오수천이 흐르고 있는 마을이다.

 

○ 용정(龍井)마을

-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년전에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 및 청주 한씨(淸州韓氏) 및 타성이 약 20여호씩 줄곧 살아온 곳인데 한때는 90호까지도 거주한바 있으나 현재는 약 60여호가 살고 있다. 용정(龍井)이라 부르게된 동기는 우물에서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용용(龍 )자 우물정(井)자 용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신기(新基)마을

- 이 마을의 옛날 이름은 둔덕리 새터라고 불리워오다가 구한말에 근방 7동네를 망라하여 행정구역상 둔덕방이라고 했는데 이곳 신기마을은 그중 3백여년전 이 웃 동촌마을에서 이필형이라는 사람이 분가하여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의 환경이 아름답고 귀한 인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하여 지기도 한다.

이 마을 뒤에는 합죽선(合竹扇)을 거꾸러 세워놓은 듯한 모양의 중후한 오노정 이 있어 마을이 믿음직하게 이를 등지고 있으며 마을 좌우측에는 속칭 풍수설 에서 말하는(靑龍, 白虎)의 양가닥 산봉이 마을을 포위하고 있고 마을 앞에는 맑은 오수천이 흐르고 있는 농경위주의 정착 마을이다.

 

○ 동촌(東村)마을

- 중국의 여응종 장수가 동촌에 거주하고 있는 김복흥을 만나기 위하여 군사를 데 리고와 지금의 둔기리에 진을 치고 김복흥과 면담하였다.

원래 김복흥은 덕인(德人)이라 둔덕(屯德) 두글자를 살리기 위하여 그대로 부 르다가 둔덕리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東村)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앞에는 오수천이 맑게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방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이웅재고가가 이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 방축(防築)마을

- 백제시대에 군량미(軍糧米) 저장지를 만들었다는 말이 내려와 마을 이름을 촉동 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 말엽에 촉동과 우번리를 합하여 방축(防築)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앞으로 섬진강 상류인 오수천이 흐르고 오수천변 옆에는 구로정이 있는 곳이기도 한데 지금부터 300여년전 이곳에 구로회관 친목모임이 있었는데 이때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곳 하천변에는 여름철이면 3~4백의 소풍객들이 찾아 와 휴일을 즐기는 곳이기도 한다.

 

○ 운교(雲橋)마을

- 이 마을은 북향촌(北向村)이며 지형이 W자형으로 되어있어 충수설로는 운중발용 (雲中發龍)격 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용(龍)이 등천할때는 구름다리가 필요하다 하여 이곳 지형에 비추어 운교(雲橋) 일명 구름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이 마을은 둔덕방(屯德坊)에 속하는 1개 마을로서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오 랫동안 동성촌(同姓村)으로 살아오고 있는 마을이다.

 

○ 구장(球場)마을

- 이 마을은 원래 둔덕방(屯德坊)에 속하는 1개 마을로서 부근이 공마장으로 되어 있었다 하여 구장(球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오랫동안 동 성촌(同姓村)으로 살아온 곳이다.

지금은 전 주민이 새마을 가꾸기에 합심하여 시범마을일뿐더러 소득면에서도 건 실하게 연초재배 및 원예작물에 힘쓰고 있으며 천수답에까지도 수리시설을 하여 임실군내에서도 보기드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살기좋은 마을이다.

 

 

○ 둔기(屯基)마을

- 옛날 진(陣)을 치고 싸움이 있어 군사가 주둔한 곳이라서 둔터라는 이름이 나왔 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둔터를 屯基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마을앞에 흐르고 있는 율천을 끼고 약 400여년전에 안동권씨(安東權氏) 가 이곳에 들어와 5~6호 살고 있엇으며 그후 3백여년전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약 50여호가 살고있는 마을로서 답 위주의 영농으로 생활을 유 지하여 오고 있다.

 

○ 대정(大井)마을

- 이 마을은 형성된지 꽤 오래된 곳으로서 야자형(也字形)이라 하여 대야촌(大也 村)으로 불러오다가 마을안에 다른 곳에서 볼수 없는 큰 우물이 있음을 특징삼 아 큰대(大)자 우물정(井)자 대정이라 부르게 됐다.

또한 이 마을에는 6백여년전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정착하여 오다가 현재는 해 주오씨 및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주집단을 이루고 있는 90여호의 큰마을로서 주 로 답위주의 영농으로 윤택한 가정을 이루는 마을이다.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에는 큰우물이 존재하고 있어 마을의 생활용수로 유일하 게 활용하고 있다.

 

○ 남악(南岳)마을

- 오수리 동북쪽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한 묘지가 있었는데 약 300여 년전에 어떤 도사가 지나면서 그 묘지가 남쪽을 향한 메부리형이 분명하다 하여 그 전설을 따서 남악(南岳)이라 이름지어 불리었다 한다.

현재는 마을 뒤편으로 전주 - 남원간 4차선 도로가 관통되고 있고 약 70여호의 영농위주로 생활하는 비교적 검소하게 살아오는 마을이다.

 

○ 상신촌(上新村)마을

- 오수리 서북쪽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약 300여년전에 어떤 오승이 묘지를 잡아주 면서 이 마을의 터가 메추리 명당터라고 해서 메추라기라 불리어 왔었는데 한일 합방이 이후 마을 이름을 오수리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상신촌(上新村)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임성(林城)동 마을

- 이 마을은 7개 뜸으로 흩어진 마을로 약 2백여년전에는 마을 근처의 산림이 무 성하게 우거져 있어 임성동(林城洞)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지금은 약 70호의 여러 성을 가진 사람이 모여 살고 있으며 전답 위주의 영농으 로 비교적 영세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 국평(菊坪)마을

- 이 마을은 약 5백여년전 어떤 오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의 뒷산 묘지가 국화 혈(菊花穴)이라 하고 앞들을 국화들의 물형(物形)을 잡았다는 전설로 인하여 국평 (菊坪)이라 마을이름을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시대에도 역시 국평(菊坪)이라고 이 름짓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비교적 경지도 좁고 가구도 30여 가구로 소득 이 적은 빈촌의 한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둔남천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 오산(梧山)마을

- 약 2백여년전에 연안김씨(延安金氏) 신제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은 터라고 전해오 고 있으며 마을의 뒷산에 금저옥반(金著玉盤)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하여 금산동 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시대에 행정리 지명을 마을 주변에 오목(梧木)이 있다 고 하여 오산(梧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은 두뜸으로서 연안김씨가 많이 거주하는 금산동 본동과 오수 서국민 학교를 비롯하여 20여호가 자리잡고 있는 평촌(坪村)등 두 뜸이 있고 답위주의 경작 및 축산농가가 다수 있어 마을 소득이 좋은 살기좋은 마을이기도 하다.

 

○ 주천(酒泉川마을

- 이조 연산군때 선비 이수(李洙)가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를 피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한 곳인데 이 마을앞 독산에 방석이 있고 그 복판이 확독같이 패어 감 주와 같은 물이 항상 고여 있었으며 나그네들이 지나가다 목이 마를때 이 물을 달게 마셨다 하여 주천(酒泉)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수(李洙)가 이물을 떠 마신 후부터는 물이 고이지 않자 스스로 호를 호은(壺隱)이라고 지었다고 전한다. 단종때에는 도승지 벼슬을 한 곽도(郭都)가 단종 폐위후 오수면 노산밑에 내려와 살다가 넷째아들 득형(得亨)으로 하여금 이곳에 터를 잡게도 하였다 한다.

현재 이 마을은 전답위주의 영농 및 과수(복숭아, 밤)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고 곽씨의 씨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약 70여호가 정착하고 있는 비교적 평온한 마 을이다.

 

○ 한암(寒岩)마을

- 전설에 의하면 약 5백여년전에 어느 겨울에 여자 장수가 마을 뒷산에 가는 도중 찬(寒)바위를 치마에 싸다가 큰 돌바위를 세웠다 하여 마을의 이름을 한암(寒岩) 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은 교하노씨(交河盧氏)가 3백여년전에 정착하여 50여가구를 이루고 있으 며 그 뒤 2백여년 전에 입주하여온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주족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 약 80여 가구로 답 위주 영농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 오촌(鰲村)마을

- 3백여년전부터 마을 앞 동네의 바위가 자라모양이라 하여 자라울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 풀이하여 오촌(鰲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에는 여러 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데 옛날에는 수리가 매우 불안 전하여 영농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으나 현재는 오암제등 수리시설이 일제말 에 설치되어 수리안전답으로서 전답 위주의 영농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 직도 영세성을 면치 못한 마을이기도 하다.

 

○ 봉산(鳳山)마을

- 약 3백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뒤 산 이름이 봉황산이어서 그 이름을 따 그 밑에 있는 이 마을도 봉산(鳳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제일 먼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 하였으며 약 50가구중 지금도 제일 많은 20여가구의 청주한씨가 거주하고 있다. 이마을의 전답은 매우 건조하 여 매년 가뭄 걱정이 떠나질 않았으나 근래에 성수면에 성남수리조합 설립 및 경지정리로 수리가 안전한 지대가 되어 답 위주의 영농으로 비교적 평온하고 살 기좋은 마을이다.

 

○ 냉천(冷泉)마을

- 지금으로부터 약 3백여년전 어떤 원님이 행차하다가 이곳에 도착하여 목이 말라 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원님은 우물이 매우 차다며 그물을 냉천수라고 말하였다는 연유로 마을의 이름을 냉천(冷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앞에는 전주 - 남원간 4차선 도로가 뚫려있고 40여가구의 조그마한 마을로 서 미맥위주 및 과수(복숭아)재배로 소득을 올려 평온하고 살기좋은 마을이기도 하다.

 

○ 종동(鍾洞)마을

- 이 마을은 1백여년전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에서 약 50M거리의 동남쪽에 있 는 바위가 북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라고 했고 또한 이름을 북샛터라 부르다가 일 제시대에 종동(鍾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현재는 약30여가구의 미맥위주 영농으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마을앞에는 둔 남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평당(坪塘)마을

- 지금부터 약 5백여년전에 산 밑으로 1~2호가 살다가 마을이 형성된곳으로 앞들 이 넓고 연못이 있다하여 지형을 따라 들땡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평당(坪塘)이 라 고쳐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앞에는 둔남천이 흐르고 있고 주소득은 답 위주의 영농이며 최근에는 과수 (복숭아)재배로 수입을 짭짤히 올리고 있어 날로 소득이 증가되고 있는 마을이다.

 

○ 군곡(君谷)마을

-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년전 무학대사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던중 이 골짜기에 도 착하자 산천을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산의 용세가 좋고 산의 물형으로 보아 군 신회조의 명당이 있다고 예언하였다 한다.

그후 물형에 따라 마을 이름을 군곡(君谷)이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은 골짜기로 접해있어 접답위주의 경작으로 영농을 유지하여 오면 서 비교적 영세성 마을이다.

 

○ 남금마을

- 조선시대 초기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년전 즉, 서기 1400년경 김해김씨 김유말 (金有末)이 벼슬을 잃고 이곳 시골로 이사하여 생활하여 오던중 조선시대말 전 주이씨가 이주해 와서부터 차츰 마을의 터가 잡혀가기 시작하였다. 김유말이 이 곳에 와서 마을앞에 있는 큰바위와 김씨만이 사는 마을이라 해서 금암(金岩)이 라 이름하고,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1,2구로 나누어 남쪽면 마을을 남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마을도 1900년경까지 80여호에 달하는 큰 규모의 마을이었으 나 보수성으로 전근대적 농촌형태를 벗지 못하다가 1972년 새마을운동의 여파로 새롭게 변모한 마을이다. 특히 1977년에는 우수 새마을로 하사금을 받아 50평 규모의 공동창고며, 지붕개량, 농로개설등의 사업을 펼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 룩하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마을이름의 유래를 지닌 바위가 지금도 있으며 인물로는 예비역 대령 진양선이 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원군 덕과면에서 임 실군 오수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북금마을

- 지금으로부터 약 5백여년전 김해김씨 김유말이 뜻하지 않는 일로 벼슬을 잃게 되었다. 평소 시골의 전원생활을 즐기던 그는 이곳에 내려와 자연과 더불어 풍 류를 즐기면 한적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후 조선시대 말엽에 전주이씨 및 세대가 산수좋은 이 마을에 이주하여 오늘 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김유말이 이곳에 자리잡은 후에 마을의 이름을 구상하 는 터에 이곳에 넓은 동산과 하천변에 큰바위가 있고 김씨만이 살고 있는지라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마을 이름을 『김바위』(사투리로 금바위)라 하엿으며 한 문으로 금암(金岩)이라 표기하였다. 위 유래의 고증이 되는 바위가 아직도 마을 앞에 남아 있으며 그후 행정구역 개편서 1,2구로 나위어 이곳을 “북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농업이 주산업인 이마을은 조선시대 말엽 1900년경만해도 80여 호가 초과하였으나 72년도부터 새마을사업에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남원군 덕과 면에서 임실군 오수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내동마을

- 정확한 자료나 옛기록이 없어 확실하지는 않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인 1400년경에 김해김씨 김유말이 남쪽으로 내려와 금암리에 살게 되었고 그 후손 이 금암마을의 500여m 떨어진 곳에 분가하여 살게 됨으로써 이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말엽 지나가는 성학자가 마을이름을 내동(內洞)이라 지어 주었는데 이것은 금암리의 “안동네”, “안골”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 되어 편리하 게 지어진 이름이다. 전라선이 지나고 있는 내동마을의 서편에는 오수천이 흐르 고 있어 수리조건이 양호하여 주산업인 농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으나 호당 경 지면적이 영세한 까닭에 부업으로 연초 재배를 면내에서 가장 많이 하고 있 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개편으로 인하여 남원군 덕과면에서 임실군 오수 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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