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계촌마을 앞
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
정려비 앞 반송나무 고자베기
(2010년 1월 정려각과 반송나무~오수고25회동창방 자료)
정려각 전경
額(액): 忠臣 贈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兼 領經筵事監 春秋館事 行 資憲大夫 工曹判書 諡 忠肅 李尙吉 之閭
충신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 춘추관사 행 자헌대부 공조판서 시 충숙 이상길 지려
숭정기원후 4신유 9월 일 중수 *(철종 11년 1861년)
碑 전면 : 忠臣 資憲大夫 工曹判書 李尙吉 之閭(충신 자헌대부 공조판서 이상길 지려)
(비 후면)
崇禎丙子胡寇猝至自 上有世臣先赴江都之 敎公以八座舊秩時在耆老承命渡江寄寓於府城十里之外長江天塹一朝失險公乃處置家事曰 廟社亡矣義不可苟活遂馳入城中而死之越明年丁丑正月也噫公以九十老病身無所職寇至則去未爲不可而乃以食焉不避之義竟捐軀而不悔不忠而能若是乎堂堂大節雖與日月爭光可也 國有褒典以 旌其閭則台山舊居亦不可闕焉故於是乎有螭頭之頌詞曰 金湯失守鐵騎飛渡一髮孤城廟貌顚倒匹馬赴難公獨何爲鴻毛一擲視死如歸忠存殉 國義著捨生流芳千載不朽者名
崇禎十四年辛巳二月立于台山舊居 撰人不傳
숭정병자호구졸지자 상유세신선부강도지 교공이팔좌구질시재기노승명도강기우어부성십리지외장강천참일조실험공내처치가사왈 묘사망의의불가구활수치입성중이사지월명연정축정월야희공이구십노병신무소직구지칙거미위불가이내이식언불피지의경연구이불회불충이능야시호당당대절수여일월쟁광가야 국유포전이 정기여칙태산구거역불가궐언고어시호유리두지송사왈 금탕실수철기비도일발고성묘모전도필마부난공독하위홍모일척시사여귀충존순 국의저사생류방천재불후자명
숭정십사년신사이월립우태산구거 찬인불전
* 只沙面誌*
숭정 병자(1636년 병자호란) 호구(청나라)가 갑자기 쳐들어와 임금이 대대로 이어온 신하들은 강화도로 먼저 가라고 하여 6판서와 함께 80살의 나이로 기노서(고관의 양로당)에 있던 공은 왕명에 따라 강을 건너 강화부성의 10리 밖에 머물러 있는데 긴 강물로 천연의 요새지인 강화도가 하루 아침에 함락하게 되니 공은 "종묘 사직이 망하는 구나! 충의도 죽는구나" 하고 성중으로 달려가 죽으니 다음해 정축 정월이다. 아! 공은 90에 늙고 병들어 직위도 없는데 적이 닥치니 어디로 갈수도 없고 먹을수도 없게 되었다. 피할수 없는 충의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후회없는 불충을 능히 실현하였으니 이렇게 할수 있는 일인가? 당당한 큰 절의는 비록 해와 달과 빛이 경쟁을 할수 있으리라. 나라에서는 보전(표창)이 있고 정려를 그의 옛 고향인 태산(계촌)에 세우고 역시 궐향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용머리가 있는 정려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금의 침입 지키지 못했네, 철갑기병이 달려와 한 털 같은 외로운 성과 종묘의 모습은 뒤집혔네, 필마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공 홀로 어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죽으러 돌아가야만 했으니 충성으로 순국한 절의로 삶을 버렸네 천년이 흘러도 그 이름 썩지 않으리.
숭정 14년(인조 19년, 1641)신사 2월 고향 태산(계촌)에 세우다. 지은이는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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