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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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따라가기/지역문화유적탐방

구로정 가는 길목 탐방

흘러 가는 2016. 3. 11. 21:27

- 답사일시: 2016.2.20.토

- 답사지: 임실군 오수면 둔덕고을 구로정 가는 길목 답사 

- 답사문화재: 체리암과 풍욕정, 노노정,영춘대와 덕가암,구연대와 구성계 단구계기실비,탑동 당간지주,춘성정 고택,하만리효감천비,왕산정 성혈,구로정,단구대와 삼계석문암각서,장성산성(적성,옹산성)



1.풍욕정(風浴亭))

풍욕정은 오수에서 둔덕리 삼계석문 가는 길목 까막재를 막 지나 신기리 오수천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2칸, 측면 1칸의 정자이다.

정자의 내부는 세월의 흔적이 지워지고 콘크리트로 덧칠되어 옛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정자의 현판 풍욕정은 "이태용"이 썻으며, 체리암 바위에 세워진 정자로 "바람이 무척시원해서 바람으로 목욕을 한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한다.

이정자는 1910년경에 당시 신기리 "이환우"선생이 지은 정자로 당초 "체리정(滯離亭)"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불에타 없어졌다한다. 정자 우측 둥근바위면에 "체리암" 과 계원의 명부가 따로 암각 되어 있으나 제방도로확장 공사로 땅속에 묻혀 지금은 확인 할길이 없다. 풍욕정 건립유래를 보면 1910년경 일제강점기때 기세가 등등한 왜인들이 각종 토목공사 자재로 쓰일 석축으로 체리암이 파괴될 처지에 놓이자  이환우선생이 주동이 되어 인근 주민들과 합세하여 체리암 위에 풍욕정을 세우고 체리암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풍욕정 전경

2.체리암(滯離巖)

현재 풍욕정 정자의 누대로 사용되고 있는 체리암은 제방 도로공사로 반 이상이 땅속에 묻혀 체리암 암각서가  보이질 않는다.

체리암은 남원부 둔덕방과 오수도찰방역 사이에 위치하며 남원고을 관리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때 마지막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전별연을 베풀던 장소이다.

아울러 둔덕방 근동에 살던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전별과 마중을 했던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체리암 아래 도랑에 돌다리는 "소혼(消魂)"이라 불리웠다 한다. 즉 "이별에 홀린 넋이 이 곳에 떠다닌다" 는 뜻인데 흔적이 없어진지 오래이다. 세월이 흘러 풍욕정과 체리암 주변에 잡풀이 우거지고 낙엽만 나뒹굴고 있다. 

체리암

좌측 바위면에 계원명부가 적혀 있다고 하나 윗부분만 보일뿐 암각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1989년 체리암과 풍욕정

집에 소장된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1989년 여름철에 찍은 체리암과 풍욕정 사진을 확인한 결과 둥근바위면에 "滯離巖" 암각글자를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지금은 도로공사로 지하에 묻혀 확인할 수없다.

1989년 체리암 암각서


3.영춘대(永春臺), 덕가암(德加岩)

영춘대와 덕가암은 풍욕정 아래 신기마을 구길 논위 산 절벽 바위에 죄우로 암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 계원명부가 쓰여있다.

신기리  근동 사람들이 1908년 영춘계(위친계)를 재조직하여 원 계원의 명단과그 뜻을 기리기위해 바위를 "영춘대""덕가암"이라 명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풍욕정과 체리암과도 깊은  유래를 간직하고 있다. 제방을 쌓기전에는 체리암과 덕가암 밑으로 하천이 돌아 흘렀다 한다. 


영춘대(永春臺), 덕가암(德加岩) 계원명부 암각서

4. 노노정(努努亭) 터

250년전 체리암 위 산 정상에 노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이 정자는 삼례의 비비정과 견줄만 하였다 하나, 지금은 그 터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산 정상 부위에는 전주이씨 종중 묘소가 산재해 있고 아래에 오수천이 흐르고 있다. 영춘대와 덕가암이 한눈에 들어와 이일대가 풍광이 수려함을 볼수있다. 지금은 체리암 위에 풍욕정의 정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 

5.구연대(龜蓮臺), 죽강 김주연 저동저수지 신설 공적비(竹崗 金柱淵 저洞貯水池 新設 功蹟碑),구성계기적비(九星契記蹟碑), 단구계유적비(丹丘契遺蹟碑)

0 구연대는 둔덕리 저동마을과 신기리 탑동마을을 연결하는 길목 바위에 암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계원이름 17명도 새겨져있다.

구연대는 마을 뒤 둔내산에서 흘러 내려온 지류가 거북이 머리 처럼 불거져나와 아마 구(龜)연대라 했을성 싶다.

 구연대 아래 작은 소하천이 흐르는데 예전에는 오수천의 본류가 이곳으로 돌아 흘러 풍광이 빼어나 "도석금(道石錦)"이러 불리웠다.

도석금은 둔덕8경의 하나인 "도연어약(道淵漁躍)"에 나오는 지명으로 "도석금 하천에 물고기 잉어가 뛰어노는 풍광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0 죽강 김주연 저동 저수지 신설 공적비(뒷면 계원명부 27명 명단이 새겨져 있다)

 둔덕리 동촌 저동마을 뒤 둔내산 줄기 아래에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저수지를 신설에 따른  순천김씨 죽강 김주연씨와 주민들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마을 어귀인 도석금 구연대 아래에 1979년 9월 이 비를 세웠다.



0 알수없는 암각의 흔적 남원부사   

0 단구계유적비

 이지역 주민들의 구로정 친목계인 구로단구계를 기리기 위해  최근에 세운 비각이다. 

 


0 구성계기적비


0 동녁굴에서 탑동으로 이어지는 옛 둔덕방길

구연대 바로 뒤로 이어지는 옛길로 바위를 깨어내어 계단을 만들어 다니기에 용이하게 하였다.

0 구연대 전경


6.하만리 효감천비(오수면 둔덕리 830-7)

"양진당하공효감천비(養眞堂河公孝感泉碑)" 방축마을앞 논 가운데 에 우물이 있고 우물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35년에 세워진 비로 예전에는 이곳에 하천이 흐르고 마을에서 이 우물을 사용하였으며 우번이 삼계석문으로 돌아가는 큰 길목이었다 한다.

효자 하만리(선조 30년-1597생)가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던 중 추운겨울 위독한 어머니가 물고기가 먹고싶다고 하자 한겨울 얼음을 깨고 가진애를 써도 구할수 자 탄식하고 있는차에 효성에 감동하여 저절로 얼음이 깨지면서 큰 잉어가 절로 나왔다한다. 잉어를 달여 어머니께 봉양을 하니 병환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그자리에 하공의 효 감천비를 세워 이를 기리고 있다 한다. 현 마을앞 왕산정뒤 하공 효 감천비는 2000년 4월 마을에서 제작 세웠다.


        

 



7. 왕산정과 성혈

왕산정은 방축마을 앞 정자로 너덜바위 위에 건립되어 있다.

왕산정 바위면에 성혈과 고누판이 암각되어있고 마을주민과 지나가는 길손이 땀을 식히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성혈은 바위면 중앙부에 고루게 분포되어 있으며 그늘을 드리우는 괴목나무 몸통 크기는 작지만 바위 암반에 뿌리를 박아 그 수령은 오래 된것으로 추정된다. 이마을의 옛 지명은 "우번(雨番)" 마을이다. 

(고누판)장기판

성혈 1

성혈2

성혈3

성혈4


(방축 마을 앞 선돌과 마을전경)


8. 구로정(九老亭) 과 단구대(丹丘臺)

 구로정은 당초 단구정 이었다 한다. 현 구로정은 팔작 기와지붕 정면 2칸 측면 1칸 으로 목재 활주로 추녀를 받혔다.

건립년대는 1656년(효종7년경)이다. 구로정 아래 큰 바위가 서있는데 이를 단구대라 한다. 단구대 바위에는 구로계의 구로일소의 명단이 암각되어 있으며 현재의 구로정 정자는 100여년전(1906년) 구로의 후손들이 세웠다 한다. 

지금의 구로정은 세월의 풍파와 관리의 소홀로 뼈대만 겨우 존속하고 있을 따름이며 옛 선인들의 풍류와 어짐이 사라진지 오래이다.

0 구로정



0 단구대, 구로장구소 암각화

0 세월에 녹아내린 흔적의 암각화

0 구로일소 명단: 구로(장제,한빈,하득도,한유,장서,장선,하만리,최휘지,최유지) 일소(이문규)~근동의 60세이상의 모임(일소48세)

단구대에서 구로일소가 철따라 모여 놀면서 우의와 세상의 담론을 펼치면서 유유자적한 풍류를 즐기던 곳이며 

구로회는 1662년 구성하였다.

(구로일소명단)

(구로유대 암각서)

0 단구(丹丘) 의 글씨는 삭녕최씨인 구로의 1인 최유지(崔攸之)가 1656년에 쓴 친필이다.

단구대의 하천건너 정면에는 대천대(對天臺)가 있고 뒤에는 적성(赤城)이 있고, 동편으로는 방장산(지리산 만복대,반야봉)이 읍을하고 서쪽으로는 동산(銅山) 이 고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단구대 뒷면 이문규 석각) 

(단구대 뒷면)


9. 삼계석문(三磎石門)

구로정 아래길로 몇십보 하천을 따라 가다보면 거대한 바위가 서있는데 그 크기는 높이 8m 폭5m정도이다.

이 정면 바위면에 세로로 "三磎石門"이 암각 되어있다. 한 글자 크기는 대략 75*85cm정도로 전체 4m정도 이다.

본 글씨체는 하동 쌍계사 입구에 쓰여진 고은 최치원 선생의 "雙磎石門(쌍계석문)" 필체를 모작하여 구로의 한분인 최유지선생의 자제인 "최기옹"이 쓴 글씨를 암각한 것이라 한다. 이는 구로의 한분인 최휘지의 "단구창설사적기"에 1663년 9월에 암각하였다고 쓰여있다.  

三磎(삼계)는 석문앞 섬진강 상류인 큰 하천이 흐르는데 獒樹川과 栗川, 鰲川(서도천)합수하여 이곳 삼계석문으로 흐르며, 옛적에는 구로정과 삼계석문아래로 대로가 있어 둔덕방에서 말천방과 돌고개방을 건너 순창군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한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실측 門 자의 크기: 가로 73cm 세로85cm) 

(정면)


(뒷면)

(측면)

10. 적성(赤城)장성산성(옹산성)

산성이름은 적성으로 불리우며 백제시대에 쌓는 산성으로 마을에서는 옹산성이라고도 한다. 정상부위에 삼계 말천방(삼은리)으로 넘어가는 성재가 있다.

이 산성은 정상 해발 250m에서  사각깬돌을 쌓아 높이는 대략 3m이상 남쪽하천 절벽 능선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방축마을 윗쪽 능선을 감아 ㅁ자 형식으로 쌓았다. 남쪽 산성 성곽은 능선을 따라 내려오는 성곽과 아래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2중구조로 성곽을 쌓았다. 북쪽과 서쪽 성벽은 지금도 확연히 남아 있다. 

(마을쪽(서)성곽)

정상부 장대 흔적

서쪽부위




서쪽성벽



서쪽 성벽안



남쪽 계곡 부위 건물터 성벽


남쪽 계곡 성벽


성벽 채석장 추정지

(산성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