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서면 사계.하월 문화재탐방]
- 일자: 2018.6.29.금
- 장소: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서원마을, 하월리 창촌마을
- 문화재: 정상윤 가옥, 창원정씨 종가, 반계정, 진주소씨정려각, 계월국민학교터, 하월리은행나무,절열양정씨지려
[丁相潤 家屋 정상윤 가옥]
- 문화재명: 정상윤 가옥(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9호 ,1984.4.1지정)
- 건축양식 및 년도: 대한제국 후기 농촌한옥 ,1938년 건립
- 위치: 장수군 산서면 서원길8
- 정상윤 약력: 장수군의회 제1대 의원(산서면'91~'95)과 2기 의회의장 (현,작고)
정상윤 가옥 안내판
담장 밖에서 바라본 사랑채와 울안 노송
사랑채와 뒷편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
안채 중문 앞뜰에 놓인 둥그런 들돌
사랑채 원형기둥 아래~ 토방위 돌 받침을 한 길다란 댓돌이 참 특이 합니다.
툇마루에 오르는 댓돌이 따로 있고요!
누마루에 한껏 기교를 부려 만든 계자각을 촘촘히 박아 그 위에 원형 돌란대를 얹어 두르고 끝부분을 대각으로 교차하여 만든 모양세가 사뭇 기교를 한층 부렸네요. 또한, 계자각 사이의 궁판에 풍혈은 구름과 나뭇잎 모양으로 뚫어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无忝堂(무첨당): 더이상 첨가할게 없다는 의미로
있는 그대로 욕심없는 삶을 살면서
평생을 한학에 전념하겠다는 뜻이 스민 당호랍니다.
率眞爲樂(솔진위락): 진실함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라는 뜻이랍니다.
행랑채의 문살 모양이 참 다양하고 화려합니다.
사랑채 현판 : 永春軒(영춘헌)영원한 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영춘헌 아래 작은 연못과 노송 ~ 누 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푸르른 노송과 연분홍 연꽃을 상상하게 합니다.
안채 모습
[昌原丁氏 宗家 창원정씨 종가]
- 문화재명: 창원정씨 종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4호 ,1984.4.1지정)
- 건축양식 및 년도: 조선후기, 대한제국 상류 한옥 ,1854년, 1927년 건립
- 위치: 장수군 산서면 서원길 16
- 창원정씨 종가 약술
* 정환(정환(丁煥),정황(丁煌)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종가 *
전라북도민속자료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앞쪽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그 너머로 낮은 야산이 펼쳐져 있어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회산 정환과 유헌 정황(丁煌) 형제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종가이다. 회산 정환은 홍문관 박사를 지냈고, 유헌 정황은 인종의 장례 때 예법을 준수할 것을 주장하다가 정미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쳤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와 행랑채는 1854년 반계 정상규가 지었고 대문채와 사랑채는 1927년에 정양수가 지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헛간채가 튼 ㄷ자형으로 배치되고 사랑채 옆에 행랑채가 경사지게 놓였다. 정환,정황 형제는 사액서원인 영천서원(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소재) 에 배향되어 추앙을 받고 있다.
* 규모가 작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지은 상류주택이며, 근처의 작은 종가인 정상윤 가옥과는 대조적이다. 같은 시기에 지었지만 정상윤 가옥이 크고 화려한데 비해, 이 집은 큰 종가이면서도 규모가 작고 소박하며 실용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안채를 제외하고는 변화된 부분이 많지 않아 원형을 비교적 잘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안채 앞마당에 검은 바위가 있는데 주변을 파면 그 중간부에 “천하대지(天下大地)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 집터가 좋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집 오른쪽에는 작은 종가인 정상윤 가옥이 위치해 있고 왼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계류 위의 언덕에는 반계 정상규가 지은 반계정이 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참고)
종가 안내문
종가 전경(대문이 굳게 잠겨 내부 탐방은 다음기회로~~~)
사랑채와 행랑채(초가집)
[盤溪亭 반계정]
- 문화재명: 비지정 문화재
- 건축양식 및 년도: 일각문 담장과 팔작지붕 전면2칸 후면 2칸에 서실 1칸을 둔 정자, 1909년 건립
- 위치: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서원길)
- 건축자: 반계 정상규
노송으로 둘러쌓인 반계정(盤溪亭)은 정상규선생이 1909년 지은 정자로 자신의 호를 따 반계정이라 했고,
100년이 훌쩍넘었으나 아직도 건재한 정자는 잘 보존되고 있고, 반계선생께서 노후에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한다.
반계정 현판
측면 모습
일각문과 낮은 담장으로 둘러쌓인 반계정 전경
노송이 기품있게 둘러싼 반계정
반계정에서 바라본 사계리 월곡마을과 좌측 진주소씨 정려각, 노거수 은행나무와 계월국민학교터
[烈女 淑人 晋州蘇氏 旌閭閣 열녀 숙인 진주소씨 정려각]
- 문화재명: 열녀 숙인 진주소씨 정려각(장수군향토문화유산 유형 제9호, 2016년 지정)
- 건축양식 및 건립년도: 정려각,1848년,1893년
- 위치: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신등마을
- 정려각 설명
열녀 진주소씨는 김연장의 처로 1705년에 태어나 21세에 남편을 잃었다. 남편의 3년상을 정성스럽게 치르고 어린딸과 양자를 잘 길렀다고 한다. 딸이 출가한 후 진주소씨는 남편의 기일을 맞아 음식을 끊고 자결하였다. 진주소씨는 1798년(정조22년) 나라에서 명정(命旌)을 받았고 1848년(현종14년)에 처음으로 정려각을 세웠다. 이건물은 1893년 재건한 것으로 조선시대 유교정책과 문중활동을 잘 보여준다(장수군)
정려각 전경
정려각 후면 전경
정려각 내부 정려비
1798년(정조22년) 명정 지려문 현판~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 김연장 지 처 열녀 숙인 진주소씨 지려"
정려각 개건기
"숭정3술갑 11월일 진주소씨의 양자 김수민 피눈물을 흘리며 근거를 기록,
1798년 명정을 받고 166년이 지난 후 1848년에 처음 정려각을 세웠는데, 1893년에 김수민의 5세손 김태술이 다시 세우고 글을 쓴다."
[계월국민학교 교가비]
- 산서면 하월리 신등마을
- 내용: 2009년 8월 계월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학교터에 교가비를 세웠다.
- 개교일:1955년 4월1일
- 폐교일: 1995년 2월28일
- 졸업생수: 1575명(남자 813, 여자 762)
계월초등학교 터비
[사계리 은행나무]- 위치: 산서면 하월리 305번지 신등마을
- 수종:은행나무(장수군 보호수 9-9-7, 1982년 8월 2일 지정)
- 수령: 430년(현465년 정도)
- 흉고: 5m
계월초등학교터에서 바라본 반계정과 서원마을
멀리 좌측 비행기재와 호남정맥 팔공산이 보이고, 우측능선이 개동천황지맥 개동산이다.
진주소씨정려각과 은행나무와 계월초교 교가비
창촌마을 도로변에서 바라본 정려각과 은행나무 구 계월초등학교 건물
[節烈兩丁氏之閭 절열양정씨지려]
- 문화재명: 절열양정씨지려(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 2000.11.7 지정)
- 건축양식 및 년도: 전각(작은 정면측면 각1칸),1723년 건립, 1819년 중수
- 위치: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 창촌마을
- 내용: 지려 "안내문 참조"
[경종3년 계유 명정 열녀 성균생원 풍천노세기 처 유인창원정씨지려] - 전각 안 좌측-
정황의 후손들이었던 이 분들의 행적은 정려각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한분은 유인 창원정씨이며 이는 정황의 현손인 석후(錫後)의 딸로 풍천인(豊川人)생원
노세기(盧世琦)에게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가족에게 온후하여 세상에 칭송을
많이 받았다 인조 16년(1638년) 봄에 도둑이 들어 남편인 노세기를 끌어내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에 부인은 도둑들에게 재물은 마음대로 가져가되 사람만 죽이지 말라고 간청
했으나 도둑들은 더욱 흉기를 휘둘러 남편을 다치게 하려 하자 부인이 남편의 몸을 가리어
무사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8년후 인조 24년(1646년)에 남편이 죽자 장사를
치른 후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
훗날 나라에서 열려의 명정을 내려 열행(烈行)을 치하하고 정문(旌門)을 건립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정려(旌閭)가 훼손되자 두 정려를 하나로 하고 편액을 한군데 걸어 현재는
하나로 유지 보존되고 있다 정려각안 왼쪽의 편액을 보면 명정(銘旌) 열녀성균생원풍천노세기처
유인창원정씨지려(烈女成均生員豊川盧世琦妻孺人昌原丁氏之閭)이라 걸려있다.(재전 장수읍향우회 카페- 발췌)
[선조 갑진 명정 절부조산대부사옹원첨정권백시처영인창원정씨지려] -전각 안 우측-
또 한분은 영인(令人)정씨이며 유헌정황의 현손인 지(至)의 딸이며 현감 권백시(權伯時)에게
출가 하였다 정유재란(1597년)때 왜적들에게 봉변을 피하고자 숲으로 피했으나 왜적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봉변을 당하게 되자 남편에게 아들을 데리고 피할것을 권하고 자신은 스스로
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훗날 나라에서 열녀의 뜻을 받들어 이 곳에 정려각을 세웠다
그때가 선조37년(1604년)이다 정려각 오른쪽 편액을 보면 선조(宣朝) (갑진년1604)명정(銘旌)
(節婦朝散大夫司甕院僉正權伯時妻令人昌原丁氏之閭)
(절부조산대부사옹원첨정권백시처영인창원정씨지려)쓰여있다 이후 조선 경종3년(1723년)에
두 분을 한군데 편액하여 모시게 된 것이다.(재전 장수읍향우회 카페-발췌)
이 정려각에는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 솜씨가 담겨 있는데 정면과 측면이 각 한 칸씩이고
정면이 더 넓은 편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내부는 2칸으로 나누어 두 정려의 정려판을 편액하여
걸어놓은 상태이다 이 곳의 정려각은 2000년 11월 17일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분 열녀의
의행을 기린 문화재로 보호가치가 높아서 전라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7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경종3년(1723)에 세우고 순조 19년(1819)에 고친 것이다 오래 되어서 보기에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때 그 시절의 절개를 지킨 열녀의 의행은 오늘날까지 후손들에게 자랑으로
전해지고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재전 장수읍향우회 카페-발췌)
[창촌마을 정자]- 소나무 숲속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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