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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련사기(勝蓮寺記)

흘러 가는 2024. 5. 5. 10:05

◎ 승련사기(勝蓮寺記)

  승련사(勝蓮寺):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요천로2675~90(산동면 식련리)

 

   저자 《이문규(李文規 1617~1688)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칙(), 호는 풍거(楓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자인 춘성정(春城正) 담손(聃孫)5대손으로, 아버지는 승의랑(承議郎) 국형(國馨)이며, 어머니는 부안김씨(扶安金氏)로 재간당(在澗堂) 김화(金澕)의 딸이다.

9(1625)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을 치를 때 의젓하고 조용히 대처하는 태도가 성인과 같아서 사람들이 쉽게 어린아이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공부하여 이해하고 터득하여 역()의 건괘(乾卦), 서경(書經)의 우공(禹貢), 통감(通鑑)의 반영론(潘榮論) 등을 섭렵하였으며 과시(誇示)와 수식(修飾)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향시에 3번 급제한 뒤 임진년 1652(효종 3)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75(숙종 원년)에 의정부(議政府) 천거로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에 나아갔고, 이어서 현릉(顯陵) 참봉에 임명되자 사양하고 돌아와 향촌에서 경전 연구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기하학(幾何學), 천문학(天文學) 등 자연의 변화에 대한 이론 등을 깨쳐 박식하였다. 재종숙 천묵재(天默齋) 충경공 (忠景公) 이상형(李尙馨)에게 일찍이 사숙하였으며 병자호란시 조부 엽()을 따라 창의에 참여하였으며, 호란에 근왕병으로 참여했던 둔덕고을 아홉 노인이 1663년에 구로계(九老契)를 만들 때 일소(一少)로 회합에 참여하여 그 이름을 빛냈다.

  만력(萬曆) 정사(1617) 28일에 남원부 둔덕방(,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동촌마을)에서 태어나 72세 때인 무진(1688) 28일 태어난 날에 세상을 마쳤다. 묘소는 남원의 북쪽 사동(巳洞) 율천(栗川) 건좌(乾坐)에 있다.

부인인 원배(元配)는 경주김씨 억()의 따님으로 무오년(1618)에 태어나 경진년(1640)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희제(熙濟)를 두었다. 차배(次配) 순흥안씨(順興安氏)는 건(+)의 따님으로 임술년(1622)에 태어나 갑진년(1664)에 세상을 떠났다. 삼취(三娶) 한양한씨는 동지(同知) ()의 따님으로 1(益濟) 3녀를 두었다.  오늘날 풍거공 후손들은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세거하고있다.

  문집으로 을미년(1885)에 후손들이 힘을 모아 유고집 2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풍거공종중에서 2001년에 국역 풍거집을 청권사(淸權祠)와 서원군(瑞原君), 고림군(高林君)종중 협력으로 발간 배포하였다. (글쓴이 김진영)

 

국역 풍거집(楓渠集) : 이문규의 시문집(2001)

승련사기(勝蓮寺記)

  이 절은 옛 승련사(勝蓮寺)이다. 형세가 뛰어나다는 것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술되어 있고 창건에 대해선 목은(牧隱)공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다시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굳이 덧붙인다면 중건에 관한 이야기와 이름 붙이게 된 의의에 관한 것일 뿐이다. 절이 다시 사라진 것은 화재回祿〕1)에 의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연대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다. 불길이 너무 강렬했음인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우거진 숲에 덤불만 무성하여 사슴과 이리떼들이 나뒹굴고 당시 범패소리 종소리 들리던 곳에 주춧돌만이 남아있었다.

  지난 숭정(崇禎) 14(1641) 경진 가을, 철오(哲悟), 처은(處誾) 두 스님이 남들이 하기 어려운 발원을 세워 성금을 모으고 터를 닦아 옛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두어 칸의 집을 지었다. 중앙에 우뚝 넓게 자리잡고 있는 곳은 무량불(無量佛)을 모신 곳이고 나는 듯 정연하게 늘어져 있는 곳은 여러 승려들이 경문을 강론하는 좌우 당()이다.

  비록 옛 형식과 잘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훤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여러 산사의 승려들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여, “무량불(無量佛)이 다시 태어났다.” 하고, 문객(文客) 등 옛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여기가 목은(牧隱)이 비문을 남겼던 곳이 아니더냐!”라고 하였다. 시골 사람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도 귀가 달토록 듣고서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 절은 동국의 으뜸이다.”라고 하고서 먼 길을 마다 않고 다투어 찾아와 예배도 하고 관람도 하고 노닐며 읊조리기도 하였다. 거의 폐허가 된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모두 두 스님의 힘이니 아름다운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절의 이름을 승련(勝蓮)이라고 하고 다시 바꾸지 않은 것은 졸암대사(拙庵大師)2)의 이름 지은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내가 살며시 생각해보건데, 연꽃은 불가(佛家)에서 특별히 중시하는 것이라 명칭은 반드시 이것과 연관된 것으로 집을 연우(蓮宇), 좌대를 연좌(蓮座), 경을 연화경(蓮花經)이라 한다. 그밖에도 연꽃으로 이름 붙이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은 왜인가? 무릇 연꽃이란 여느 꽃들보다 빼어나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 곧게 올라와 선명한 꽃을 피운다. 진흙 밭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맑음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이를 도()로 증명한다면 진흙은 육진(六塵)3)에 해당하며 곧게 뻗어 올라온 것은 끊임없이 선근(善根)을 길러 동류에서 빼어난 것에 해당하며 지혜가 광명(光明)한 것은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맑음을 유지한 것이며 회삼귀일(會三歸一)4)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연꽃은 보면 불도(佛道)의 전반이 모두 갖춰져 있다.

  그러므로 경()과 좌()와 우() 등에 빠짐없이 명명한 것은 실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실()과 상()은 불교의 진상(眞相)이고 무()와 공()은 불교의 극치이다. ()을 통해 공()에 이르고 유()에서 벗어나 무()로 들어가야 만이 모든 인연이 사라지고 모든 법이 텅 비어 보좌(寶座)를 버리고 피안(彼岸)으로 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절의 이름을 연꽃()이라 하지 않고 승련(勝蓮)이라 한 것은 연꽃을 벗어나 삼매(三昧)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불교의 오묘함이 여기에 이르러 더할 것이 없으며 졸암대사의 말이 한결 깊고도 깊은 것이다.

  혹자는, 절 뒤의 석봉(石峰)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것이 마치 한 송이 백련이 아직 피지 않고 입을 다문 모습과 같다고 해서 승련이라 이름한 것이라 하는데 이는 별개의 의미에서 해석한 것일 뿐 결코 경내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이 어찌 졸암의 본 뜻이겠는가.

  아! 옛날 진()나라 때 혜원법사(慧遠法師)5)가 광려산(匡廬山) 위에서 결사(結社)를 하고서 이를 백련사(白蓮寺)라고 했는데 내 일찍이 그 이름을 생각하면서 그 의의에 탄복해 마지 않았다. 이제 이 절의 이름과 서로 견주어 본다면 혜원법사의 백련은 연꽃은 본받아 실상(實相)을 밝히는 것이며 졸암대사의 승련은 연꽃을 떠나 실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실상을 뛰어넘으려고 할 때 실상을 말미암지 않으면 뛰어넘으려 해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실상을 통하면서도 실상을 비워야 한다면 뛰어넘지 않으려 해도 뛰어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의미는 공존하여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취의 유, 무로 말한다면 조금도 경지의 차이가 없다. ! 누가 혜원법사의 뒤에 졸암대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랴! (풍거집에서~김진영)

 

 1)회록(回祿): 불이 나는 재앙

 2)졸암대사(拙庵大師): 고려시대의 승려. 각진국사(國師)의 문인으로 남원(南原)의 금강사(金剛寺)를 세웠다.

 3)육진(六塵): 불교에서 말하는 육식(六識). 곧 색(), (), (), (), (), ()에서 일어나는 여섯 가지 욕정이      다. 육적(六賊)이라고도 한다.

4)회삼귀일(會三歸一): 법화경(法華經)의 대의(大義)로써 삼승(三乘: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모아서 일불승    (一佛乘)으로 돌아가게 함을 말함.

5)혜원법사 백련사(白蓮寺): 동진(東晉)의 혜원법사가 여산(廬山)의 호계(虎溪) 동림사(東林寺)에서 승려 혜영(惠永) 및 명유(名儒) 유유민(劉遺民) 123인과 함께 서방정업(西方淨業)을 닦기 위하여 백련사(白蓮寺)를 결사(結社)한 것을 말한다.

승련사(남원 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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