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이고오! 나아주욱네에! 나아주욱어!
여인이 땅을 치면서 울고 있었다.
그녀는 언덕에 쓰러진 채 풀잎을 뜯으면서 짐승의 신음소리와도 같은 괴상한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것은 신세타령과도 같은 묘한 타령조의 일정한 곡조를 띠고 있었다.
울음 절반 타령 절반이었다.
아이고오, 세상에! 사람들아 세상에! 원 세상에, 이럴 쑤가 있당가아! 이러얼 쑤우가아 있당가아! 청대 같은 사람을 워떤 놈의 원귀가 씌어서어! 요롷게도 모질게에, 난도질을 한단 말잉가아! 쥑일라머언 나를 쥑이제에! 세상에 우리 아들이, 무신 죄가 있다고오! 요롷게 모질게도오! 괴기덩어리맹키로오! 송장을 맹그렀뿌린당가아!
여인은 좀처럼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무서운 분노의 불길이 복바치는 가슴 속으로부터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여인은 두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치기도 하고, 땅을 퍽퍽 치다가는 풀밭에 쓰러진 채 몸부림을 치면서 뼈저리게 아픈 울음을 게워내고 있었다.
뼈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무친 서름이 터져 나오는 울음 이었다.
여인의 비통한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서인지 뜸북새가 울고 있었다.
이날 따라 파아랗게 개인 가을 하늘이 무표정한 눈으로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슬픔은 이 여인 한 사람만의 슬픔이 아니었다.
빨치산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곳에는 반드시 남편이나 자식을 잃게 되는 여인들의 통곡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인민위원회 도당사령부가 설치되어 있던 회문산과 여분산 골짜기는 비참한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라북도의 순창군 구림면 일대는 여인들의 통곡 소리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욱 살풍경하게 만들고 있었다.
박순지 여인의 남편 양병로씨는 구림면 농회장으로 있었는데, 그는 38명의 군단위 기관장 및 지방의 유지들과 함께 운남천에서 돌에 맞고 죽창에 찔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와 같은 참상으로 인하여 남편을 잃은 과부가 일시에 4백명이나 생겨났다.
인민군 삼남지역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회문산 ㅡ
9.28수복 이후 3년동안이나 빨치산의 은거지 였던 이 회문산 일대는 임자 없는 해골바가지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지리산 입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게 되자 무려 3만여명이나 몰려들어 은거지를 삼는 곳이 바로 이 회문산 이었다.
이 빨치산들은 자기들이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회문산 계곡 가막골에 소위 인민학교를 설립했고, 실탄공장을 만들어서 재기의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살인과 방화와 약탈의 무대는 장군봉 국사봉 천황봉 내장산 백연산 원통산 용골산 성수산 팔공산 문수산 추월산 등지를 이용한 임실군 순창군 남원군 정읍군 장수군 진안군 무주군 그리고 전라남도의 담양과 장성 등지였는데, 낮으로는 으례껏 아군지역으로 화하고 밤에는 적지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지역의 사내들은 실탄을 짊어진 채 노무자로 끌려갔고, 부녀자들은 겁탈을 당하다가 죽음을 당하는등 갖은 만행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야수처럼 악랄한 빨치산들의 숫법은 날이 갈수록 더욱 험악해져 가고 있었고, 살인과 약탈, 혹은 방화의 방법도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인민군총사령부는 3만여명을 헤아리는 주민들을 쌍치국민학교에 모아놓고 소위 인민궐기대회를 한다고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것은 보기 드물게 악날한 최악의 인민재판이었다.
말이 재판이지 재판이라고 할 수 없는 엉터리 재판이었다.
재판이라고 해야 내용도 형식도 없는 억지수단이었다.
아무런 죄목도 없는 사람을 끌어내어놓고 변호사도 판사도 검사도 없이 처형하는 엉터리 재판이었다.
재판이래야 뻔했다.
인민군 소대장이라는 자가 단상에 오른다.
그리고는 말도 안되는 말을 되는대로 지껄인다.
인민의 해방을 위한 애국적 투쟁에 아낌없는 박수를 당부한다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처단할 사람을 실날하게 비판하면서 반동으로 몰아 세운다.
선량한 양민들을 반동으로 몰아 죽이는 살인행위를 그들은 말끝마다 공공연하게 애국적 투쟁이라고 강조한다.
인민군 소대장이라는 자는 쌍치국민회 간부였던 김창섭씨를 반동으로 몰아 세우면서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악을 바락 바락 쓰고 있었다.
인민군들의 총뿌리 앞에서 공포에 떨던 주민들이 흘금 흘금 눈치를 보면서 마음에도 없는 박수를 보내자, 김창섭씨에게는 간단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인민군들은 국민학교 정문 앞에다가 김창섭씨를 묶어놓고 3만여명의 주민이 밖으로 나가면서 의무적으로 찌르고 베어 죽이도록 강요했다.
주민들은 인민군들의 총뿌리의 강압에 못이겨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그들이 강요하는대로 죽창과 괭이와 소시랑 등의 농기구로 찌르고 찍고 돌로 치면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차마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면서 머뭇거리는 주민들에게는 말총꼬리의 채찍이 사정없이 날라들었다.
그리하여 김창섭씨는 반항 한번도 못해보고 온몸을 찔리우고 찢기운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인민재판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김창섭씨가 억울하게도 목숨을 잃은지 며칠이 안되어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의 살인극은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이 마음대로 들러붙인 피고인은 김창섭씨의 동생인 김남섭씨와 김병섭씨, 그들의 부인 박인순 조말동 두 여인 이었다.
빨치산들은 이들을 전암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게 한 다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 차례로 몽둥이로 뒷통수를 때려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은 다음, 다시 죽창으로 찌르고 흙을 덮어 버리는 생매장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인민재판은 계속되었다.
쌍치국민회장 신천휴씨는 그의 부인 백광옥여사, 그리고 그의 아들(신상우)과 함께 무참히도 죽어갔고, 금성마을의 창고에 갇혀 있던 우익청년들이 억울하게 숨져갔다.
이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개죽음을 당하면서 이스락처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특히 독립촉성회 순창군위원장을 지냈으며, 경찰후원회장 및 순창농업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했던 조익환씨와 4대 순창군수였던 조일수씨 일가족 6명이 죽음을 당했고, 계속해서 2백81명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무참하게도 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순창군 쌍치면에서는 악명 높은 인민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죄없는 지방 유지들과 양민들을 돌로 때려죽인 인간도살장으로 유명하지만, 구림면 일대는 그에 못지 않은 만큼 처참한 살인극이 연출되었던 곳으로 악명이 높다.
순창군 구림면의 14개 리, 45개 자연부락은 6.25이전부터 북괴 게릴라의 침투 은거지역이었다.
인민위원회 도당사령부가 회문산과 여분산에 설치되어 진지를 구축함에 따라 이 지역주민들의 피해는 실로 막중한 것이었다.
10월 초순으로 접어들던 가을 날, 빨치산들은 구림 농회창고에 가둬놓은 면단위 기관장 및 지방유지들을 운남천으로 끌고 가서는 모조리 돌멩이로 뒤통수를 내리 갈긴후 죽창으로 찌러 죽였다.
특히 경찰가족의 여인들 모두를 나체로 벌거벗긴 후 송곳으로 온 몸을 찔러서 피를 흘리며 심한 고통을 하게 한 다음에 죽이는가 하면,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락의 주민들을 마치 소몰이 하듯이 매일밤 산채로 끌고 가서는 노무자로 활용하고, 심지어는 간첩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단풍이 붉게 물든 여분산 계곡은 피의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빨치산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였지만, 시체까지도 냇물에 띄어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금창리의 90가구 중에서 40가구의 주부가 미망인이 되었고, 금상리 부락과 황학부락 주민들은 절반이상이 고향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가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약탈한 물건들을 저장해 놓고 장소를 옮길 때마다 주민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불응하면 무자비하게 죽이곤 했는데, 현지의 양민들은 그들의 방패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빨치산들은 아군과 싸울 때 양민들을 희생물로 앞장을 세웠고, 물건을 약탈하여 도주할때는 척후병이나 안내자로 이용하는가 하면, 약탈지역 선정을 위한 정탐꾼으로도 이용했던 것이다.
회문산과 여분산 계곡은 도내 곳곳에서 끌려온 양민들을 무수히 학살했기 때문에, 골짜기 여기 저기 가는 곳마다 악취를 풍기는 시체들을 보게 되었다.
때죽음을 당한 시체들은 대부분 공동의 이름으로 한 곳에 수십명씩 묻히게 되었고, 이 무덤들은 1년에 한번씩 떼몰려 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제사의 술잔을 받게 되었다.
회문산 깊은 골짜기에 처박힌 채 세월을 보내는 주인 없는 시체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볼품 사납게 허어연 백골을 드러내 보인다.
백골들은 허연 잇빨을 앙다문채 퀭한 눈으로 시퍼런 허공을 노려보게 되었고, 죽은 이의 탄대 수통 단검 탄창 반합 등의 군용품들이 시나브로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회문산 골짜기마다 버려진 죽음들ㅡㅡ
살아 있을 때의 영혼은 날아가 버리고 껍질로만 남아있는 시체들.
깊은 원한의 상처를 풀잎에 어루만지면서 허옇게 바래져가는 해골바가지들.
그 해골바가지 위로 단풍잎이 떨어지고, 그리고는 세월이 잠시 지나면 그 위로 눈이 오고, 그리고는 또 봄이 온다.
바야흐로 눈이 녹기를 시작하면서 상처투성이인 우리들의 산하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서 한많은 무덤들을 새로운 풀잎으로 일으켜 세운다.
1952년 봄.
북부산에 잠든 오수역장의 무덤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들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무덤엔, 지난 해에 입힌 떼풀이 파릇 파릇 되살아나서 이곳을 지나는 대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였다.
야, 임마! 어서 들어!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가 역장의 무덤 앞에 술을 따라놓고 쪼굴치고 앉은채 중얼거리고 있었다.
실은 중얼거린다는 표현 보다는, 절반은 울면서 절반은 격한 소리를 지른다고 해야 타당한 표현이 될 것이다.
게워 낸 울음을 다시 삼키기도 하고, 삼켰던 울음을 다시 게워내면서 가락을 섞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는 역장의 친구나 됨직한 사나이였다.
야, 어서 들라니까!
사나이의 목소리가 약간씩 흔들린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지만 말고 말야, 쭈욱 한잔 들어라니까!
사나이는 술을 마시면서 중얼거렸고, 중얼거리다가는 생각난듯이 술을 마셨다.
사나이는 투명한 술이 남실 남실 넘치는 술잔을 들고 구시렁 거리다가는 문득 생각난듯이 그 술을 홀짝 마시고는 또 다시 술을 부었다.
말금한 술이었다.
사내는 오징어 다리를 쭉 찢어서 입에 물고는 질겅 질겅 씹으면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이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과 목덜미에 벌써부터 술기운이 올랐는지 핏기가 벌겋게 오르고 있었다.
..........짜아식! 바보처럼 멍청하니 보고만 있을 게 뭐람! 자, 한 잔 해라! 한 잔 하란 말이닷 임마! 그렇게 물끄럼히 바라보지만 말고! 내가 이제사 왔다고 그러기냐?
아니면............, 설마 깡술을 마시라고 해서 삐친 것은 아니겠지? 사람이란 죽으면 잘 삐친다드라마는 넌 삐치면 못써 임마!
사내는 연신 중얼 거렸고, 그러면서도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무덤의 풀잎을 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 연신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짜아식!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니? 내 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나? .........짜아식! 바보처럼 멍청하니 보고만 있을게 뭐람! 자, 한 잔 해라! 한 잔 하란 말이닷! 임마! 그렇게 물끄럼히 바라보지만 말고! 내가 이제사 왔다고 그러기냐? 아니면.............,
그러면서 그는 또 연신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이 자식........야, 임마! 너는 왜 죽어서도 이모양이냐? 이발이라도 하고 앉아 있어야지! 이렇게 듬성 듬성...........
손톱으로 풀잎을 뜯으면서 중얼거리던 사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또 문득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다시금 무덤 앞으로 어정 어정 걸어가서는 쭈굴치고 앉는다.
그는 무덤 앞의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술잔에는 말금한 술이 가득히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하얀 종발에는 파아란 풀잎이 떠돌고 있었다.
............야, 정말로 한 잔 안할래? 죽으면 마음도 변하기냐? 야, 임마! 마음까지 변하냔 말이닷 임마!
사내는 또 다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종발을 입에 물고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술을 쭈욱 들이킨다.
크으!
사내가 입술에 묻은 풀잎을 떼어 내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그는 또 오징어 다리를 아까처럼 찢어서 질겅 질겅 씹으면서 잔을 채웠다.
............머리카락을 뿌리진 마라, 임마! 네 머리카락은 안먹을란다! 자, 내 술 한잔 받아 마셔라!
사내는 술을 무덤 앞에 질금 질금 부었다.
잠시 누웠던 연한 풀잎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떼풀을 지게에 지고 고지로 향하는 주민들이 이쪽으로 돌아보곤 하였다.
주민들은 사내의 거동이 이상하다는 듯이 흘금 흘금 훔쳐 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원들과 힘을 합해서 공비들의 이동 루트를 차단하고, 불시의 야습을 막기 위하여 고지를 세우거나 보수하기에 한창이었다.
각 고지마다 30여명의 대원들이 파견되어 교대를 하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각 고지마다 기관총이 배치되었다.
대원들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고장 주민들은 하루 속히 안심하고 살기 위하여 고지마다 초소를 구축하는데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들은 편히 잠잘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고지의 초소와 그 책임자들은 다음과 같다.
마옥진 = 남고지
황점룡 = 북고지
곽래은 = 주천고지
김종채 = 한암고지
박정환 = 오촌고지
이기능 = 둔덕고지
김이봉 = 운교고지
박순어 = 마치고지
이 즈음 둔남면 특동대의 인원은 1백50명에 달하고 있었다.
박종수 대장을 위시하여 김현주 김옥기 김규현 등의 소대장들은 대원들에게 은폐동작이나 사격자세 등의 군사훈련을 틈틈히 가르치곤 하였다.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동 루트에서 김규현 소대장이 은폐를 하고 있다가 위치가 불리함을 깨닫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김규현 소대장이 있던 곳으로 뛰어 들었던 이이용 대원이 공비들로부터 사격을 받아 우측 가슴을 맞고 쓰러졌던 오봉산전투에서의 실수가 있는 후부터 대원들의 규율은 더욱 엄격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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