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는 만일사(萬日寺)라는 절이 있었다.
이 절은 공비들이 원통산과 회문산 일대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에 이 만일사는 소위 김일성대학으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즉 공비들에 의해서 자기들끼리만 불리어지는 자칭 김일성대학이었다.
공비들은 이 만일사를 공산주의 이론을 무장시키는데 있어서 학습의 도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는 사제 수류탄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특히 회문산 일대에는 인민군 패잔병들이 모여들어 대부대를 이루고 있었다.
북괴군 잔당들이 운집하여 빨치산 부대를 강화 시키는 여기에는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발동기를 이용하여 방아까지 찧는 형편이었다.
여기에서는 인민보라는 이름의 신문이 발간되어 각 지역의 빨치산 부대는 물론이요, 도처에 흩어진 좌익분자들에게까지 배포되기도 하였다.
활판 인쇄로 된 신문이 아니라, 원지를 철판에 긁어서 등사기에 민 신문이었으나 글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이게 그 놈들의 인민보라는 신문이란 말이시!
이런 걸 만들어 낼만한 겨를이 없을텐데..............
괴상한 놈들이야.
전부가 선전이군.
왼통 자랑 뿐이지.
자랑할 게 없을텐데...........
거짓 자랑이지.
허위 선전을 누가 믿겠나?
그럴듯하게 적혀 있지. 읽어 보게.
××전투여단은 ××를 기습..........?
혁명사업일꾼들이 무기를 노획 했다고?
그럴듯하게 조작했군.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믿게 마련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대원들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무렵, 만일사의 낮과 밤은 각각 두 세계가 주관하고 있었다.
낮에는 경찰이 점령하고, 밤에는 공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만일사를 사이에 두고, 낮과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마치 밀물과 썰물처럼 날마다 밀려들고 밀려나는 것이었다.
낮과 밤, 그것은 숙명처럼 자유와 독재, 평화의 이념과 전쟁의 사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대결 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이 어수선한 고지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외따로 떨어진 집이 한 채 있었다.
이 집에는 머리가 허였게 센 백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학정리라는 마을에 속하는 지역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은 이 노인을 가리켜 학정노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학정노인에게도 만일사와 같은 운명의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학정노인은 숙명처럼 낮에는 경찰을 맞아들여야 했고, 밤으로는 공비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음이 원하거나, 원하지 안하건간에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지닌 채 아슬아슬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학정노인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알지 못했다.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사상적 대립은 칠십평생을 괴롭히게 된 것이었다.
오갑수 삼계면 지서장은 이 학정노인을 통하여 회문산의 빨치산 대장 외팔이와 서신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 편지를 통하여 공비들에게 자수하기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공비들은 오히려 오갑수 지서장에게 투항하라는 서신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오갑수 삼계 지서장은 둔남면에서 지원을 나온 김현주 지휘자와 함께 대원들을 이끌고 학정으로 접어 들었다.
그가 외딴집에 다달았을 때, 학정노인은 공비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 주었다.
지서장님! 어젯밤엔 외팔이가 왔었읍니다!
네, 그래서요?
학정노인이 이야기를 할 때면 길게 느려진 하얀 수염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학정노인은 건장한 체구를 정좌를 하고 앉은 채 차근 차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심심산골에서 소일하면서 세월을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물로 보였다.
귀골이 장대한 학정 노인이 입을 열 때마다 우렁 우렁한 그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뭐라고 하던가요?
하고 김현주가 캐묻자
빨치산 외팔이 부대장 말씀이죠?
하고 학정 노인이 묻는다.
네, 그렇습니다.
하고 김현주가 대답하자, 학정노인은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지난번에 지서장님께서 부탁하신대로 신변은 책임을 지고 보장해 줄테니 이제는 그만 순순히 자수를 하란다고 하였더니 그 외팔이가 삐식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학정노인은 아까부터 담배통에 잰 잎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몇 차례 뻐끔 뻐끔 빨아들이고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하는 말이,
아 이, 그 오갑수가 말이라! 큰 오해짓을 하고 있단 말이시! 머리는 참 좋은 사람인데 말이라! 어째서 우리에게 투항을 안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시! 이렇게 말합디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오갑수 지서장의 얼굴에는 약간의 쓴 웃음이 스쳐가고 있었다.
영감님.
하고 오갑수 지서장이 부르자, 담배를 몇 모금 빨던 학정노인이 담뱃대에서 입을 떼면서
예?
하고 오갑수 지서장을 바라본다.
그 사람이 오면 이렇게 말해 주십시오.
어떻게요?
조금만 지나면, 불과 몇 달 사이에는 여단작전이 될테니까, 그 안에 하루 속히 자수하라고 하십시오. 외팔이부대가 아직까지도 여단작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모양인데,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그래야 되겠구먼.
학정노인이 담뱃대 꼭지를 재털이에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한 편으로는 자수하기를 권하면서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총을 겨누고 싸워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공비들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살육과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 양민들을 끌어내어 무참하게도 학살하는 일을 보통으로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가 하면, 웃으면서 팔이나 다리를 잘라 내기도 한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사람을 죽인다 하여도, 소위 자기들의 적화사업을 위해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익힌 학습 가운데 공산주의자의 신조가 있다. 이 소련공산주의자의 신조 제10항에는 <어떠한 행위, 예컨대 살인이나 양친을 밀고하는 행위도 공산주의의 목적에 도움이 되면 정당화 된다>는 구절이 명시되어 있다.
그들은 민가에 들어와서 약탈해 가는 게 일쑤인데, 이것을 소위 당의 사업이라고 말한다.
당을 위하는 행동이면 무슨일을 하든지 모두가 다 정당화된다고 믿는데에서 잔인한 행동이 나오게 된다.
백연산에도 상당수의 공비들이 있었다.
임실 둔남 운암 강진 신평 신덕 등지의 특동대원들이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임실군 둔남면의 박종수 특동대장은 대원들과 함께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뛰어다니던 터라 배가 고팠다. 뭐든지 먹고 싶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잘 익은 옥수수가 보였다. 눈이 번쩍 뜨이었다.
약간의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옥수수 밭에는 이제 바야흐로 잘 익은 옥수수가 누우런 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박대장은 대원들과 함께 옥수수를 비틀어 따들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날것으로 먹는 옥수수였지만 그런데로 먹을만했다.
그는 연신 옥수수를 물어 뜯어 먹으면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대원들도 그랬다.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뛰어 다녔기 때문에 배가 몹시도 고팠으나, 옥수수를 날것으로나마 먹은 다음부터 뱃속이 든든했다.
박대장이 다 먹은 옥수수 깡치를 집어 던지는데 문득,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게 보였다.
순간, 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잽산 몸짓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약간 구부린 채 우측 팔을 들어 대원들에게 정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비슷한 복장에 역시 같은 총을 서로 가졌을 경우에는 상대편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분별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흔히 육감으로 알기 마련이다.
다르륵 ㅡㅡ 다르르륵 ㅡㅡ
다르륵 ㅡㅡ 다르를륵 ㅡㅡ
기관총 소리가 울렸다. 기관총 소리는 적막하던 산을 찌렁 찌렁 울리고 있었다.
일순간의 일이었다.
기관총 소리는 마치 숯굴 모양의 도치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었다.
박대장은 대원들을 향하여
엎드려라!
하고 소리쳤다.
대장님! 안되겠읍니다.
저 놈의 도치카 때문이야!
제가 부숴버리겠읍니다.
대원 다섯병만 데리고 뒤로 돌아서 가라!
넷! 알겠읍니다!
화력은 계속 보태줄테니, 눈치 못채게 돌아가라!
대원들이 떠난 뒤 박대장은 도치카를 향하여 지원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공비들은 임실군당으로서, 회문산에서 백연산으로 이동해 온 부대였다.
임실군 특동대의 합동작전에 동원된 무장병력은 60여명이었으나 공비들의 도치카 속 에서 쏟아져 나오는 기관총의 화력은 완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박대장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수류탄을 까들고 도치카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는 대원들의 성공을 빌고 있었다.
이 때 쾅 ㅡㅡ 하고 폭음이 울리면서 도치카가 우루루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뿌우연 흙먼지가 자욱히 피어나오고 있었다.
쾅 ㅡㅡ 쾅 ㅡㅡ
건너편 토치카에서도 폭음이 울렸다.
뒤로 돌아간 대원들이 수류탄을 까서 도치카 속으로 집어넣은 게 폭발한 것이었다.
대원들이 와아 와아 소리를 지르면서 돌격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공비는 도주했읍니다.
사살은?
일곱명입니다.
시체를 묻어 주고 노획한 무기를 확인해!
넷! 알겠읍니다!
박대장은 도치카 뒤의 능선을 돌아 보았다.
소를 잡아먹은 말둑이 여기 저기 박혀 있었다.
소의 가죽이 솥 모양으로 걸려 있는 말둑도 눈에 띄었다.
국을 끓여 먹는 소가죽이었다.
소의 가죽을 사방의 말둑에 붙들어 맨 다음 물을 붓고 국을 끓이면 소가죽은 타지 않는다. 고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주었다.
소가죽 속에는 국물이 남은게 고여 있었다.
뭉덕 뭉덕 잘려진 고깃점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소고기 기름이었다.
박대장은 그 소가죽 솥에 손가락을 담가 보았다.
아직까지도 약간의 따뜻한 온기가 손가락 끝을 맴돌고 있었다.
커다란 솥이 걸려 있는 여기 저기에서 타다 남은 연기가 가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밥을 해먹다가 도주한 게 분명하다고 박대장은 단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 같이 쫓기우고 쫓던 어느 날, 김현주와 김규현은 대원들을 이끌고 지사면 아침재를 넘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들녘으로 끝없이 퍼져 나가는 보리밭에서는 알을 벤 보리가 가득 가득 실려 있었고, 싱그러운 보리냄새가 물신 물신 풍겨 나오고 있었다.
겨우내 인고의 눈더미를 이고 견디어 온 보람이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싱그러운 보리누름을 바라보면서 대원들은 삼봉산을 넘었다.
이들은 오봉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지!
김현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지휘자의 명령을 기다리는 대원들을 향하여 김현주는 각자의 몸을 음폐하도록 명령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저, 오봉고지가 수상하다. 척후병은 적정을 살피고 와야 되겠다.
김현주가 말하자, 김완두와 김용호 두 대원이 앞으로 불쑥 나서면서 다녀 오겠읍니다!
하고 말했다.
이들 두대원이 간단한 지시를 받고 오봉고지를 향하여 접근해 가고 있었다.
이들이 떠난 뒤 얼마 안되어서 갑자기 딱꿍!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주는 이소리를 듣자 마자
고지를 향하여 사격!
하고 소리쳤다.
다르륵 딱꿍 따따따따 뿌웅
뿌웅 뿌웅 딱꿍 타르륵 타르륵
조용했던 산악지대는 갑자기 치열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대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정을 살피기 위해서 산을 오르던 두 대원이 사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소대장님하고 하고 김용호 대원이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김완두 대원이 보이지 않자, 다른 또 한 사람의 대원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하고 김용호 대원의 표정을 살폈다.
완두가 총을 맞았읍니다!
아까 소리 난 그 아세보총에?
네!
죽었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확인 못했지?
네!
김현주 소대장은 대원들을 향하여 소리쳤다.
저 놈들이 물러갈 때까지 사격한다!
김현주 소대장의 눈엔 불이 일었다. 무서우리만치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길이었다.
사격!
순간, 총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산허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산을 찌렁 찌렁 울렸고, 골짜기 마다 메아리쳐 나가고 있었다.
김규현 소대장은 수풀 속에서 문득 누군가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접근하면서 숲속을 이리 저리 살폈다.
소대장니임!
긴 포복자세로 기어 내려오던 김완두 대원의 눈길과 김규현 소대장의 눈길이 거의 동시에 서로 마주치는 순간, 머리를 약간 들어 올렸던 김완두 대원이 끙 소리를 내면서 푹 엎어졌다.
완두가 기어서 왔다! 빨리 옮겨 가자!
김규현 소대장이 소리치자 대원들이 달려왔다.
김완두 대원은 무성하게 자라난 풀 위에 엠원소총을 움켜 쥔 채 죽은듯이 엎어져 있었다.
소대장이 맥을 짚어 보았다. 맥은 아직 살아 있었다.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가 국방색 옷의 앞가슴을 흥건히 적시고, 초록빛 풀밭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군복에는 붉은 피가 온통 엉겨붙어 있었다.
시간이 급하다! 즉시 철수한다!
김현주 소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원들은 잽싸게 움직였다.
피를 너무나 많이 흘렸어!
죽을지도 몰라!
우리 피를 넣어 주자!
병원엘 빨리 가야 돼!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해야지!
살릴수 있을거야!
살려야지!
혼수상태에 빠진 김완두의 육중한 체구는 대원의 등에 업힌 채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벌써 산그늘이 내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적막이 고였다.
가슬가슬거리는 보리 언덕을 지나
자꾸 자꾸 고무신이
치마 끝을 밟는
걸음걸이로 보이는
저게 故鄕 길인데
야하
수만의 아름다운 들꽃이
소꿉놀이하던 손가락의 수만큼
낯이 익어 오는데
세월을 쓸어 보면 그 안의 세월을
쓸어 보면
오 親舊야
넌 어릴적 밭이랑에서
손 내밀고 다가서는 날 보고
팔랑 팔랑 나비처럼 춤추면서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리움은 눈에 들어도 아프지 않는데 말야
그리움은 눈에 들어도 아프지 않는데 말야.
ㅡㅡ 咸東鮮의 詩<뻐꾸기 울음뒤의 親舊생각은>에서 ㅡㅡ
'지역이야기 > 조국행진곡(祖國行進曲) - 실록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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