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 3구가 상주도 없이 출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 때 초상난 이 집에 한 소년이 찾아 들고 있었다.
신채근 이라는 19세 소년이었다.
중학생 이었던 그는 북괴군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에 징용되어 북으로 끌려 가다가 신탄진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맨발인채로 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것이었다.
신채근소년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집에 들어서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형수들의 애끓는 통곡이 또 다시 터져 나왔고, 동네 사람들도 모두들 목을 놓아 울었다.
신채근 소년의 할아버지인 신희석씨와 아버지 신영찬씨, 그리고 그의 형인 신호근씨(당30세.일본대학 졸업. 부안중학교 교사)는 내무서원에 의해 회의 참석을 구실로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사무실 가설창고에 80여명의 양민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이들 양민들은 10시경에 손을 등뒤로 돌리우고, 양 엄지 손가락을 철사줄로 묶이운뒤, 입에는 자갈을 물리우고 눈을 가리운채 끌려갔다.
또한 트럭으로 망산이라는 야산으로 수송된 양민들은 한 사람씩 끌려가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당했다.
양민들은 북괴군이 시키는 대로 8미터 깊이의 구덩이 앞에 선다.
북괴군은 몽둥이로 양민들의 두통수를 때린 다음, 구덩이 속으로 차 넣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숨지지 않은 채 흙더미에 묻혀 질식해서 죽는다.
여기에서의 북괴군들은 총 한방 쏘지 않고 선량한 양민들을 70여명이나 한꺼번에 몰사시키는 것이었다.
屍山血海(시산혈해)ㅡㅡ.
바로 그것이었다.
차마 눈을 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 땅을 치며 울부짖으면서 남편을 잃은 부녀자들은 하늘을 우러러 호곡하고 있었다.
신채근 소년의 어머니 진대지 여사는 시체 3구가 널 속에 안치되어 있는 방에서 자결을 기도했다가 가족에게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다.
상여가 나가고 있었다.
상주는 이제 돌아온 신채근 소년이었지만, 그는 허탈 상태에 빠져 상여 뒤를 따를수가 없었다.
소년은 쓰러졌다.
풀이 짙푸르게 우거진 논두렁 위에 쓰러진 소년의 귓가에는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군들의 만가 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어어 하아ㅡㅡ 어어 하아ㅡㅡ
어이 가리ㅡㅡ 어어 하아ㅡㅡ
위와 같이 처참한 만행은 이곳 부안군 벽산면 평교리 뿐만 아니라, 북괴군이 발붙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살육이 뒤따라랐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주형무소는(교도소)죽음의 생지옥이 되어 있었다.
북괴군은 7월 22일에 전주형무소를 완전히 장악한 후 우익 인사들을 체포 하였다가 9월 24일에서 26일까지의 3일 동안에 5명씩 조를 지어 무참히도 학살하였다.
이 때는 무려 3백여명이나 무참히도 학살되었는데, 숨진 인사들의 시체더미는 형무소(교도소) 뒤에 있는 방공호에 마치 김장거리를 절이듯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맨 머저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정웅진 전주시장이었다.
대부분의 우익 인사들은 이 쇠스랑에 찍혀 죽기도 하는가 하면, 뭉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다음에 땅속에 묻혀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는데, 흙속에 묻혀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도 더러는 있었다.
공비들의 준동이 심한 곳은 지리산 일대와 그 주변 지역이었다.
해발 8백미터의 세석평전의 광활한 이 고원지대는 이현상 게릴라부대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이 곳은 북괴군 4개사단으로 2만명이나 되는 빨치산 부대 병력의 소굴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30개 부락을 습격하여 무려 2천명이나 되는 양민들을 납치해 간 빨치산의 소굴이었다.
이들은 지서와 부락을 습격했고, 또 심지어는 군청소재지인 곡성을 기습하여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공비들은 당시 지리산 안에 본부를 둔 소위 남반부인민유격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총지휘 아래 남부군단, 45, 46, 53, 57, 68, 81, 92, 605, 807사단 등을 조직편성하여 게릴라 작전을 폈다.
이 무렵, 최악의 사태가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 일어났다.
1951년 11월 29일 새벽 3시경에 공비 약 1천여명은 악양면 소재지를 비롯하여 면내의 30여개 부락을 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악양 지서만이 사투를 전개하여 점령을 모면했으나, 면 일대가 공비들의 수중에 떨어져 수복된 남한 땅 한복판에서 북괴군에 의한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지방의 유지들과 한청단원들을 소위 인민재판을 열어 총살하고 민가를 기습하여 각종의 물품을 약탈했다.
이들, 공비들의 만행은 12월 아침, 아군의 반격으로 퇴각할 때까지 79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공비들은 아군의 거센 반격에 쫓겨 가면서 면민 2천명을 추수한 곡식을 지어서 끌고 갔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서 정부는 미군과 협의한 끝에 백야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던바 전방에 있던 수도사단과 8사단을 이 작전에 투입하였다.
12월 2일부터 시작된 공비토벌 작전은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이 남쪽을 8사단(사단장 최영희)이 북쪽에서 각각 지리산을 포위하여 샅샅이 뒤져 나갔다.
한편, 악양 지서주임 황수훈 경위는 탄약이 다 떨어지자 후퇴를 제의 했는데, 그 때 옆에 있던 황수훈 경위의 부인은 책상 위의 권총을 집어 들어 남편을 겨냥하고 후퇴를 반대하면서 울부짖었다.
후퇴하면 안돼요! 당신이 후퇴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주민들은 당신만 바라보고 있어요!
당신이 후퇴하면 안돼요! 만일에 후퇴를 하시려거든 우리 가족들을 먼저 죽이고 가세요!
황수훈 경위의 부인은 강경했다.
후퇴를 극구 반대하는 그녀의 말은 결연했다.
...........당신 말이 옳소! 난 당신의 말을 따르겠소! 난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이 없오! 일단 죽었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싸울 작정이오!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 황수훈 경위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고, 주위에서 이를 바라보던 경찰관과 지방 청년들은 황수훈 지서주임을 중심으로 철석같이 굳게 단결하였다.
이들은 굳게 뭉친 힘으로 국군 26연대에 의해서 수복이 될 때까지 79시간 동안을 계속하여 지서를 사수 할 수가 있었다.
지리산 피아골은 빨치산의 근거지였으며, 무수한 살육이 일어나는 생지옥이었다.
피아골은 연곡사에서 반야봉 까지의 40리에 이르는 계곡으로 피어린 격전지가 되어 있었다.
피아골은 반야봉에 있는 적의 남부군단 사령부를 지키는 길목이었는데, 골짜기 양 옆 능선에 개인호를 파고 위장을 한 채 포진한 적때문에 백야전투사령부의 소탕 작전 이전에는 군경토벌대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만을 거듭해 오던 곳이었다.
이제 드디어 아군의 총공격에 따라 12월 2일 구례를 떠난 1연대(연대장 박춘식 중령)가 피아골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12월 3일 완전히 장악하고, 4일에는 노고단과 반야봉을 점령함으로써 적의 남부군단을 격파하게 되었다.
격전장은 지리산과 그 연봉인 삼봉산, 회문산, 백운산, 운장산, 덕유산 등 수없이 많았다.
공비 토벌 작전은 1951년 10월부터 그 이듬해인 52년 2월까지 전개되었는데, 지리산 일원에 걸친 전투참가 부대는 백야전투사령부, 수도사단, 8사단, 11사단, 기갑연대, 1연대, 26연대, 10연대, 16영대, 21연대, 그리고 김용배 사령관(준장)이 지휘하는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치안국장 대리로서 최치환 경무관이 이끄는 치안국전방사령부, 이성우 경무관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태백산지구경찰전투사령부, 신상묵 사령관이 지휘하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그리고 각 지방의 자경대, 또는 특동대 및 대한청년단원 등 연인원 10만여명이 공비소탕을 위해서 이 지방 일대의 산하를 누볐다.
군과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공비토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비들이 발붙일 곳을 주지 않은 민심, 즉 공산주의에 대한 주민들의 뼈에 사무친 저주와 투철한 반공의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개인 이른 아침이었다.
지프를 몰고 오던 흑인병사가 초소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 흑인 병사는 초소에서 얼굴을 내미는 한근호 삼계면 특동대장에게 손을 들어 보이면서 씨익 웃는다.
푸른 군복 밖으로 튀어나온 까아만 얼굴이 유난히도 돋보였다.
그가 웃을때는 까아만 얼굴, 두터운 입술이 눈을 끌었다.
연신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하얀이가 유난히도 희게 드러나 보였다.
그 흑인병사의 두터운 입술이 열리면서 영어가 튀어 나왔다.
엑스 큐즈미!
흑인 병사가 뭐라고 지껄였으나, 한근호 삼계면 특동대장은 알아 들을 수가 었었다.
한근호 특동대장은 머리를 약간 까딱애 보이면서, 빙그레 웃어 보이고 있었는데, 이 때 그 흑인 병사는 맥주 한 상자를 차에서 내려 놓으면서 무슨말인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또 다시 맥주를 컵에 부어 마시는 시늉을 손짓으로 해 보이면서 또 하얀이를 유난히도 희게 드러내면서 씨익 한번 웃고는 차에 올랐다.
이때 한근호 대장은
땡큐 베리마취! 땡큐 베리마취!
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흑인병사는 한근호 대장에게 활짝 웃어 보이면서 지프를 몰고 달리기 시작하였다.
뽀오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멀어져 가는 지프를 바라보던 한근호 대장은 문득 박종수 대장을 생각해 내었다.
오랫만에 맥주나 실컷 마셔야지............
그는 맥주 상자를 어깨에 메고 박종수 대장 집으로 향하였다.
남과 북으로 툭터져 나간 그 들녘의 논과 밭에는 이제 바야흐로 푸른 보리가 가득히 실려 있었다.
겨우내 눈더미를 인채 웅장한 자태를 드리내고 섰던 팔공산에도 천황봉에도 눈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노산재의 울창한 수풀도 더욱 윤기 자르르한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박종수 대장을 찾아간 그는 오래간만에 단 둘이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야, 근호야!
무슨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너, 어쩔려고 술을 그렇게 마시냐.
내가 술을 안먹게 됐어?
어지간히 들게.
누가 이걸 마시게 하는지 아니?
마시게 하다니?
빨치산이 나에게 술을 먹인다!
빨치산이?
그래 빨치산! 그 놈들을 때려 잡을 때까지 맥주나 실컷 마시고만 싶다.
근호야!
임마, 넌 몰라!
뭘 가지고 그래?
난 말야! 얼마 못살 것만 같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야! 내 느낌은 틀림이 없어!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쳐!
.........종수야! 난 이게 뭐냐! 삼계면 특동대장이라는 놈이 말야! 자기 관내의 지역을 지키지도 못하고 말야! 너에게 얹혀서 이게 뭐냐! 도대체 나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단 말이다! 죽어야지.......... 암, 죽어야 하고 말고!
야, 근호야 임마! 쓸데없는 주정 좀 그만해라!
뭐라고?
이젠 그만 마셔!
술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대원들에게 돌아갈 술을 따로 두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암튼지 나는 삼계로 가야 한다.
지금은 위험해!
위험하니까 내가 가야지!
꼭 갈텐가?
꼭 가야겠네.
가더라도 말야, 신작로로는 절대로 가지마라.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제발 부탁한다. 산길로만 꼭 다녀라.
산길로?
그래 산길로!
죽을 놈이 산길로 피해 다니면 더 잘 죽는다.
뭐라고?
나처럼 노리는 놈들이 많으면 말야. 버젓이 다녀야 못쏘는 법이야.
조심해!
암, 조심해야지!
한근호 대장이 맥주병 나발을 불면서 일어 섰다.
야, 종수야 나 갈란다!
그가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산길로 잘 살펴 가라.
염려 마.
그가 대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한근호 대장이 떠난지 두 시간쯤 지나서 박종수 대장은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특동대 본부에 들린지 얼마 안되어서 뜻하지 않은 비보를 들었다.
초소에 나와 있던 대원이 사무실로 들이 닥치면서
대장님! 대장님! 큰 일 났읍니다.
하고 소리쳤다.
뭐야?
박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한근호 삼계 대장님이 사살당했읍니다.
뭐얏!?
박대장은 눈앞이 캄캄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유명을 달리 하다니.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었다.
가자!
박대장이 길을 나섰다.
대원들도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행길에서 소로 길로 접어 들면 산등성이를 넘어서 가로 질러 가는 길이 있었다.
한근호 삼계면 특동대장의 시체는 그 소로길 옆 풀밭에 엎어져 있었다.
그는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뜯어서 잔뜩 움켜쥐고 있었다.
시체의 주변에는 멧방석 넓이 만큼의 풀이 뜯겨져 있었다.
눈을 뜨고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살려고 애를 쓴 흔적입니다!
하고 한사람의 대원이 말하자,
아까운 사람이야!
하고 박대장이 말했다.
박대장이 군모를 벗어 들자, 대원들도 군모를 벗어 들었다.
박대장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대원들도 무두들 눈을 감고 있었다.
대원모두들 진심으로 유명을 달리한 한근호 대장의 명복을 빌고 있었는데, 이들의 눈에서는 제각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생비극, 그리고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이 민족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너편 둔덕 넘어에서는 무우ㅡㅡ무우ㅡㅡ하고 어미소 우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 오고 있었다.
끝내 바라던 統一을 이룩하지 못한 채
이름도 없는 싸움터 嶺마루에
내가 쓰러 지거든
戰友로 하여금 들꽃을 꺽게 하지도 말라
피 쏟는 가슴에 太極旗 덮게 하지도 말라
아이들에게 遺傳될 財産目錄은 마련 안해도 좋고
무덤을 파고 墓標를 세워야할 필요도 없느니라.
여우며 까마귀 떼 뜯고 남은 頭蓋骨에
<한평생 원하던 天池물 한 모금
못 먹고 가버린 사나이>라고
멋드러진 글체로 아로새겨 보았던들
누구하나 흥겨워 질리도 없느니라
北으로 향하는 颱風이 풍기는 季節
中東部 山脈을 따라 마구 딩굴어 가노라면
봉우리 마다 부딛치어 깨어지고 쪼개지노라면
정녕 그 어느 날이고
바스러진 骸骨 가루 가루 싸락눈처럼 휘날리어
천고에 깊은 天池 속으로 영원히 잠길 것이니라.
ㅡㅡ張虎崗의 詩<내가 쓰러지거든>에서ㅡㅡ
'지역이야기 > 조국행진곡(祖國行進曲) - 실록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국행진곡 - 밀물과 썰물 - (0) | 2020.08.19 |
---|---|
조국행진곡 - 마치재 풍산(風散) - (0) | 2020.08.14 |
조국행진곡 - 코리언 솔져 - (0) | 2020.08.03 |
조국행진곡 - 선무공작 (宣撫工作)- (0) | 2020.07.31 |
조국행진곡 - 위기일발(危機一髮) - (0) | 2020.07.30 |